강필리(姜必履,1713~1767)는 1713년(조선 숙종 39년 癸巳) 9월 4일 忠南 唐津郡 唐津邑 九龍里에서 아버지 강선(姜橏)과 어머니 남원윤씨 사이에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석여(錫汝). 할아버지는 강석제(姜碩齊)이고, 아버지는 진사 강선(姜橏)이다. 어머니는 남원윤씨 윤욱(尹勖)의 딸이고, 부인은 권부(權扶)의 딸이다. 강부사의 출생지에 관해 살펴보면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등을 인용한 한민족대백과사전, 부산역사문화대전에는 전남 강진 출생, 위키백과와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同譜’·‘1991년 順天府使 姜必履公 遺蹟 百牛塔 百牛碑 除幕式 資料’에는 출생지를 충남 당진군 당진읍 구룡리라고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한민족백과사전과 부산역사문화대전의 출생지 기록은 誤記이므로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겠다.

 

1747년(영조 23)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62년(영조 38) 지평으로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옹호하다가 삭직되었으나 곧 복관되어 도당록(都堂錄)[홍문관 교리 등을 임명하기 위한 2차 선거 기록]에 이름을 올렸다. 얼마 후 홍문관 교리를 거쳐, 청도군수, 남양어사(南陽御史)·강화순심어사(江華巡審御史)로 나가는 등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그 뒤 부승지, 호조참의를 거쳐 1763년 순천부사, 1764년에 동래부사, 1766년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 右副承旨) 겸(兼) 상의원부 제조(尙衣院 副 提調)가 되었다..

 

강부사는 1763년(영조 39년) 순천부사로 부임하여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은 기근이 심한데다가 우역(牛疫)이 유행하여 농우의 8할이 폐사(斃死)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니 공은 자신의 녹봉(祿俸)과 사재를 털어서 농우 32마리를 사서 농가에 분배 사육케 하고 부역(賦役)을 줄이고 세금을 감하는 등 선정(善政)을 하다가 동래부사로 전임되었다.

 

수년 후 농우가 150마리로 늘어나니, 백우비명(百牛碑名)의 비문에 의하면 순천 부민(府民)들이 강부사가 소 32마리를 나누어준 1763년으로부터 7년후이고 부사 사후 3년후인 1780년(영조 46년) 백우비(百牛碑)를 세워 공을 송덕(頌德)해 오다가 홍수로 비(碑)가 유실(流失)된지 오래되였다,

이를 안타갑게 여긴 순천시민들이 1991년 9월 20일 전남도와 순천시의 보조(補助)와 지방 유림(儒林) 유지(有志) 및 강(姜)씨 문중 등의 헌성(獻誠)으로 총사업비 1억5천만원(지방비보조금 3천만원, 진주강씨 헌성금 1억 2천만원)을 투입하여 순천시 조곡동 295-5 죽도봉(竹島峰)공원 연자루(燕子樓) 공원광장 남쪽 백우비(百牛碑)와 백우탑동상(百牛塔銅像) 등을 복원하여 공의 유덕(遺德)을 다시 기리게 되었고 강문(姜門)에서는 그 조형물(造形物) 일체를 순천시에 기증하여 영구관리 보존케 하였다.

 

★ 진주강씨 백우탑 복원 추진위원회 헌성금(1억 2천만원 내역) 헌성록

강태수 전 중앙종회장 1억원, 강길태 순천 간호전문대학장 3백만원, 수정각대표 강주홍 3백만원, 강호열 2백만원, 강삼영 1백만원, 강계수 1백만원, 이외에도 151인의 강씨 종중회원이 참여하여 총 157인이 총 120,480,000원 헌성하시어 백우탑과 백우비를 건립하였는데, 총사업비의 66.7%, 총 헌성금의 83%를 헌성해 주신 강태수 전 중앙종회장이 안계셨다면 강필리 순천부사 유적지 복원사업은 영원히 복원이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백우비(百牛碑)와 백우탑동상(百牛塔銅像)에 관하여 고찰해 보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 먼저 이곳 부지 중앙의 백우탑(百牛塔) 정면 하단에는 홍문관대제학 황경원〔黃景源:1709(숙종 35)∼1787(정조 11)〕이 강부사를 송덕하면서 강부사가 소 32마리를 나누어준 1763년으로부터 7년 후이고 강부사 사후 3년 후인 1780년(영조 46년) 영조 왕명으로 지은 임봉교서(任 奉敎書) 백우비명(百牛碑名) 한글본이 있고, 백우탑 뒷면에는 1991년 8월 순천향교 전교 황규중(黃圭中)이 지은 백우비 복원기(百牛碑 復元記) 한문본과 한글본이 있다.

 

두 번째, 백우탑(百牛塔) 바로옆 좌측 비문에는 강필리 부사가 순천부사로 부임한 것을 시로 지은 강남요(江南謠) 위쪽에는 한문본․ 아래쪽에는 한글본이 있다.

 

세 번째, 부지 좌측의 백우비(百牛碑) 뒷면에는 홍문관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이 왕명으로 지은 임봉교서(任奉敎書) 백우비명(百牛碑名) 한문본, 백우비(百牛碑) 옆면에는 성균관 전례위원장 正熙의 백우비 복원기(百牛碑 復元記)가 있다.

 

네 번째, 부지우측의 백우탑 옆 비문에는 강부사가 녹봉으로 소 32마리를 사서 백성에게 나누어준 공덕을 칭송하는 1784년(정조 8년) 강남악부(江南樂府)의 저자 조현범(趙顯範)이 지은 사팔우(四八牛) 한문본과 한글본, 강남악부(江南樂府) 발췌 사팔우 한문본이 있다.

 

강남악부(江南樂府)는 조현범(趙顯範)이 휴옹(休翁) 심광세(沈光世)의 「해동악부(海東樂府)」를 본따 좋은 말과 행적을 제목별로 나누어 시가를 짓고 ‘강남악부’라 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강남악부」는 5·7언장단구로 이루어져 있고 전편은 152수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악부문학이 역사적 사실을 시로 읊고 있기 때문에 시의 내용은 서사성이 강한 것이 일반적이다. 소재는 당시 사회윤리에서 행동규범의 최우선으로 삼은 효와 열을 많이 다루고, 지방의 미풍을 되도록 널리 오래 보존하려는 작자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부산역사문화대전의 강필리(姜必履)에 관한 기록을 보면, 강부사가 1764년(영조 40년)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전년에 조엄(趙曮)이 일본통신사로 갔다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동래지방에 심게 한 일이 있었는데 월동방법을 자세히 몰라 모두 동사(凍死)한 사실을 알고, 공이 대마도(對馬島). 사람으로부터 다시 종근(種根)을 구하여 동래와 절영도에 심게 하고 재배법을 기록한 「감저보」(甘藷譜/*감저=고구마)라는 책자를 발간함으로써 고구마가 널리 보급되었다. 고구마는 수확량이 많고, 맛이 좋으며, 흉년에 쌀을 대신할 수 있고, 술을 담글 수 있는 등 13가지 장점을 들고, 여러 가지 재배법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동래 온천을 대대적으로 개축, 정비하였다. 웅장한 9칸 건물을 짓고, 뜨거운 물이 솟는 온정(溫井)을 뚫었으며 탕도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나누었다.

 

동래부사 당시 선생의 공을 기려 송덕비(頌德碑)인 온정 개건비(溫井改建碑)가 동래부사 부임 2년 후인 1766년(영조 42)에 건립되어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금강 공원에 보존되어 있는데, 1972.6.26.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있다. 또한 강필리 거사단(姜必履 去思壇)이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에 있다. 거사단은 역사적으로나 정신사적으로 나라와 지역 사회에 큰 공을 쌓은 이들을 공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1767년(영조 43년 丁亥) 11월 1일 향년 56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20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애인휼민(愛人恤民)하는 당시에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목민관이었다.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군자면(현 군자동) 백마산에 있다.

 

강필리(姜必履) 부사(府使)의 家系

강필리(姜必履) 부사의 家系는 박사공파(博士公派)로 박사공의 5세 군보(君寶)-6세 시(蓍)-7세 회중(淮仲)-8세 안수(安壽)-9세 휘(徽)-10세 자평(子平)-11세 형(詗)-12세 영숙(永叔)-13세 온(溫)-14세 사상(士尙)-15세 담(紞)-16세 홍익(弘益)- 17세 침(琛)-18세 석제(碩齊)-19세 선(墡)-20세 필리(必履)이시다.

 

강필리 부사에 관한 기록의 문의

강필리 부사에 관한 기록의 문의는 1991년 전남 순천에 백우탑과 백우비를 건립하는데 있어 총사업비 1억 5천만원의 66.7%인 사재 1억원을 기탁금으로 헌성해주시고 지방비 3천만원 지원예산확보·건립부지 결정·기획·비문의 한문 한글본 문안 작성·시공에 물심양면으로 앞장서신 광주광역시에 거주하시는 전 진주강씨중앙회장 강태수 현종(휴대폰 010-3611-0978), 진주강씨중앙종보 471호(2016.1.20. 발행) 제2면에 ‘강필리 부사 절영도 고구마 재배’ 원고를 작성 제공해 주신 부산광역시 영도구 문화자문위원이시며 부산광역시종회 부회장이신 강태인 현종(휴대폰 010-9231-3008), ‘【강진원 칼럼】조선 중기 목민관 순천부사 강필리 선생과 백우비’를 이데이뉴스(2016.1.24.), 전남경제뉴스(2016.1.25.) 네이버 진주강씨광주전남종회이사 휴정 강진원 블로그 칼럼난에 기고해 언론 및 인터넷 홍보에 앞장서주신 전남 순천시종회 강진원 현종(휴대폰 010-3628-4517)에게 문의 하시기 바란다.

 

 

강필리(姜必履) 선생

출처 : 다음카페>진주강씨 광주전남종회>홈> 한국의 인물 > 조선중기의 인물> 게시번호 2번 > 2012.6.17. > 관리자 글> 강필리(姜必履) 선생

 

강필리는 숙종 39년(계사 1713) 충남 당진에서 출생하였다. 문과에 올라 교리, 청도군수, 순심어사(巡審御使) 부승지, 호조참의, 순천부사, 동래부사,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남양어사(南陽御史)․강화순심어사(江華巡審御史)로 나가는 등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

 

순천부사 때(1763년) 연이은 흉년으로 백성들은 기근이 심한데다가 우역(牛疫)이 유행하여 농우의 8할이 폐사(斃死)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니 공은 자신의 녹봉(祿俸)과 사재를 털어서 농우 32마리를 사서 농가에 분배 사육케 하고 부역(賦役)을 줄이고 세금을 감하는 등 선정(善政) 하다가 동래부사로 전임되었다.

 

수년 후 농우가 150마리로 늘어나니 순천 부민(府民)들이 백우비(百牛碑)를 세워 공을 송덕(頌德)해 오다가 홍수로 비(碑)가 유실(流失)된지 오래더니, 1991년 전남도와 순천시의 보조(補助)와 지방 유림(儒林) 유지(有志) 및 강(姜)씨 문중 등의 헌성(獻誠)으로 순천시 죽도봉(竹島峰)공원 연자루(燕子樓) 옆에 백우비(百牛碑)와 백우탑동상(百牛塔銅像) 등을 복원하여 공의 유덕(遺德)을 다시 기리게 되었고 강문(姜門)에서는 그 조형물(造形物) 일체를 순천시에 기증하여 영구관리 보존케 하였다.

 

공은 동래부사로 부임(1764년)하여, 전년(1763년)에 경상도 관찰사 조엄(趙曮, 1619~1777)이 일본통신사로 갔다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동래지방에 심게 한 일이 있었는데 월동방법을 자세히 몰라 모두 동사(凍死)한 사실을 알고, 공이 대마도(對馬島). 사람으로부터 다시 종근(種根)을 구하여 동래와 절영도에 심게 하고 재배법을 기록한 「감저보」(甘藷譜/*감저=고구마)라는 책자를 발간함으로써 고구마가 널리 보급되었다.

 

온정개건비: 공은 또한 동래온천을 정비하여 막힌 온정(溫井)을 뚫고, 남녀탕을 구분하여 화려한 건물 9칸(九間)을 짓고 대문 관리사(管理舍) 등 제반 시설을 획기적(劃期的)으로 개선하였으니 당시 세워진 공의 송덕비(頌德碑)인 「(溫井改建碑)」가 지금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 (1972.6.26) 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135-26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 높이 144cm, 너비 61cm.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동래의 온정(溫井:온천)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766년(영조 42)에 화강석으로 세운 비석으로 용각(龍閣)내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매몰(埋沒)되어가던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1592)공의 충절을 적극 발현(發顯)시켜 후일 충렬사(忠烈祠)에 합향(合享)하게 되었고, 조정(朝廷)으로부터 증전(贈典)을 받게 하였다. 그밖에도 많은 치적(治績)을 남겨 당시 (동래)부민들이 세운 선정송덕비(善政頌德碑)가 지금도 금강공원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공은 봉선지성(奉先之誠/봉선=선조(先祖)의 덕업(德業)을 이어받아 지킴.)도 대단하여 170년전에 실묘(失墓)한 고령어곡(高靈御谷)의 문경공(文敬公/*君寶 박사공 5세)墓 심묘(尋墓)를 주도(主導)하고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 고령군 성산면 어곡리]

내직(內職)으로 체임(遞任/*벼슬을 갈아 냄)되면서 어곡선영(御谷先塋)에 위답(位畓/*위토답=산소에서 제사를 지내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경작하는 논) 70두락(斗落)을 매입 헌납하기도 했다. 어곡재(御谷齋)에 공의 공적(功績)을 기리는 비(碑)가 세워져 있다.

 

공은 외직(外職)에서 세운 공이 인정되어 동래부사에서 대사간(大司諫/*조선 시대에 둔, 사간원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3품으로, 임금에게 정사의 잘못을 간(諫)하는 일을 맡았다.)으로 승차(陞差)되어 재임 중 영조 43년(정해, 1767)에 55세로 별세하였다.

 

강필리(姜必履) 부사의 家系는 박사공파(博士公派)로 박사공의 5세 군보(君寶)-6세 시(蓍)-7세 회중(淮仲)-8세 안수(安壽)-9세 휘(徽)-10세 자평(子平)-11세 동(詷)-12세 영숙(永叔)-13세 온(溫)-14세 사상(士尙)-15세 담(紞)-16세 홍익(弘益)- 17세 침(琛)-18세 석제(碩齊)-19세 선(墡)-20세 필리(必履)이시다.

 

강필리 부사에 관한 기록의 문의는 1991년 전남 순천에 백우탑과 백우비를 건립하는데 있어 총사업비 1억 5천만원의 66.7%인 사재 1억원을 기탁금으로 헌성해주시고 지방비 3천만원 지원예산확보·건립부지 결정·기획·비문의 한문 한글본 문안 작성·시공에 물심양면으로 앞장서신 광주광역시에 거주하시는 전 진주강씨중앙회장 강태수 현종(휴대폰 010-3611-0978), 진주강씨중앙정보 471호(2016.1.20. 발행) 제2면에 ‘강필리 부사 절영도 고구마 재배’ 원고를 작성 제공해 주신 부산광역시 영도구 문화자문위원이시며 부산광역시종회 부회장이신 강태인 현종(휴대폰 010-9231-3008), ‘【강진원 칼럼】조선 중기 목민관 순천부사 강필리 선생과 백우비’를 이데이뉴스(2016.1.24.), 전남경제뉴스(2016.1.25.) 네이버 진주강씨광주전남종회이사 휴정 강진원 블로그 칼럼난에 기고해 언론 및 인터넷 홍보에 앞장서주신 전남 순천시종회 강진원 현종(휴대폰 010-3628-4517)에게 문의 하시기 바란다.

 

 

온정개건비 [溫井改建碑]

 

온정개건비 [溫井改建碑]: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 높이 144cm, 너비 61cm.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4호.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가 동래의 온정(溫井:온천)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766년(영조 42)에 화강석으로 세운 비석으로 용각(龍閣)내에 보존되어 있다.

 

동래온천은 옛 부터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한때는 욕객들의 편의를 위해 역마를 배치하고 온정 부근에 관립여관인 온정원(溫井院)을 두어 각지에서 몰려드는 욕객들을 수용하였다.

 

조선 중기에 들어 동래온천에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일본인까지 몰려오자 온천수원의 확보와 욕조의 정비, 욕사(浴舍)의 증축이 필요하였다.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자연 용출의 온천은 원수(源水)의 많은 사용에 따라 말라버렸으며, 새로운 천원(泉源)의 굴착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숙종 때부터 영조 때까지 동래온천에 대한 대대적 정비와 보수가 뒤따르게 되었다. 1691년(숙종 17) 동래부사 김홍복(金洪福)이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고천원(古泉源) 부근에 새로운 천원을 파 온정가(溫井家) 7칸과 행랑 5칸을 건립하였으나, 이것 역시 용출량이 부족하였다. 이에 1729년(영조 5)에 부사 이광세(李光世)가, 1740년 부사 박사창(朴師昌)이 계속 정비․보수작업을 하였으나 온천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후 욕객들이 더욱 많아지자 동래부사 강필리는 옛 천원 근방을 굴착하여 수량이 풍부한 새 천원을 얻게 되었으며, 큰 돌로 탕 두 개를 만들어 남녀가 별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9칸의 욕사를 새로이 짓고 비석을 세워 강필리가 온정을 개건한 목적과 그 규모 및 공적을 새겼다.

 

이 비석은 동래온천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이때부터 동래온천사상 공중 욕탕식의 남녀 별탕이 본격화되었다. 온정개건비 앞에 현재 남아있는 석조(石槽)는 남탕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라 전한다.

 

≪참고문헌≫ 釜山의 文化財(부산직할시, 1982)

 

≪참고문헌≫ 釜山市史(釜山直轄市史編纂委員會, 1991)

 

 

 

온정개건비[네이버 백과]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는 온정을 강필리가 대대적으로 수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지정번호 부산기념물 제14호 /지정연도 1972년 6월 26일 /소재지 부산 동래구 온천동 135-26

 

크기 높이 144cm, 폭 61cm /면적 339㎡ /분류 석비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동래온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의 재상 충원공이 이곳에 와서 온정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 산천조(山川條) 온정란을 보면 동래온천은 신라 때부터 알려져 있었고 물이 달걀을 익힐 만큼 뜨거웠으며 병자가 목욕을 하면 병이 잘 나아 예로부터 왕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1617년에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한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봉산욕행록》에는 당시의 상황을 㰡샘의 안팎에 석감(石龕)이 있는데 하나의 감에 5~6명이 들어갈 수 있고, 샘물은 위쪽 백공에서 흘러나오는데 그 물은 매우 뜨거워 갑자기 손발을 넣을 수가 없다㰡‘라고 기록하였다. 그 후 강필리가 온정을 다시 지었다.

 

이 비석은 동래부사 강필리가 온정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념비로 온정의 유래와 효험 등에 대하여 기록하였다. 높이는 144cm, 폭은 61cm이다. 비문에 따르면 1691년(숙종 17)에 건물을 짓고 돌로 두 개의 탕을 만들었는데 그 후 건물이 낡아 탕이 막힌 것을 새로 동래부사로 부임한 강필리가 이를 다시 고쳐 짓고 남탕과 여탕을 구획한 9칸 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상쾌하고 화려하여 마치 꿩이 나는 것 같다고 하였으며, 관리하는 집을 짓고 대문을 만들고 비를 세웠던 것을 알 수 있다. 비는 1766년(영조 42) 10월에 세웠으며 비문은 송광적(宋光迪)이 썼다.

 

이 온정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소되었다. 1878년에는 처음으로 일본인들의 전용 목욕탕이 생기고 1898년(광무 2)에는 일본인 위탁의 여관이 생겼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이곳 온천장도 일본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한국 원주민은 그 이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경내에는 1991년 온천용각을 복원하여 해마다 음력 9월 9일 사단법인 동래온천번영회 주관으로 온천용왕대제를 지낸다.

 

출처 : 다음카페>진주강씨 광주전남종회>홈> 한국의 인물 > 조선중기의 인물> 게시번호 2번 > 2012.6.17. > 강필리(姜必履) 선생

 

다음카페 진주강씨 광주전남종회 강필리선생 출처 원문보기 :

http://cafe.daum.net/jinjukangkj/3Gci/2

 

 

 

백우비명

 

강필리 부사께서 승정원 우부승지(‘좌부승지’의 착오인 듯)의 벼슬을 지내다가 순천부사로 부임할 때 흉년이 들고 많은 소가 병으로 죽어 백성들이 밭갈이를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봉급으로 소 서른 두 마리를 사서 나누어주며 농사를 짓게 하니 일곱 해 뒤에는 그 소가 백 오십 마리로 불어났다.

 

이에 백성들이 강 부사를 송덕하고자 백우비라 이름짓고 (임금께서) 신에게 그 비문을 하교하시니 문득 시경 소아편에 써있는 ‘누가 너에게 소가 없다고 하느냐. 황우가 아흔 마리일세’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대개 소가 아흔 마리에 이르면 갖가지 소를 볼 수 있는데 건강한 소는 양 귀가 윤택한 법이다. 그래서 시경에 ‘저 소들이 돌아오네 귀와 귀를 벌름거리며...’라고 했다.

 

옛 주나라에 공우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제사나 귀빈접대에 쓰는 것이 아니고 농사짓는 데 쓰게 하였다.

시로 읊기를 ‘너의 밭을 빨리 갈고 넓은 들을 갈게 하라. 밭일을 하되 그 짝이 천만이(‘천 마리’의 오기인 듯) 되게 하라’고 했다. 대체로 농사에 소가 없으면 한 들에서 여러 사람이 짝지어 일을 하겠는가.

 

강 부사가 순천에 와서 백성을 지성으로 사랑하고 부역을 덜어주고 아픈 사람과 외로운 사람에게 온정을 베풀면서 밭갈이할 소까지 나누어 주었으니 시경에서 말한 천 마리 소와 짝이 되어 삼십 리 넓은 들을 끝내라 함이 아니겠는가.

 

순천 백성이 강 부사의 은혜를 기려 비를 세우고자 비명을 백우비라 하였으나 그 소들이 백 년이 못되어 천 마리가 될 것이니 그 비명을 천우비라 한들 어떠하리.

고려 때 순천부사 최석이 선정을 쌓고 떠날 때 백성이 말 여덟 마리를 드렸는데 최 부사가 받지 않아 팔마비를 세워 그 공을 기렸다.

백우비는 천(‘청’자의 오기인 듯)백리는 물론이며 정성으로 백성을 보살피며 여학에 힘쓰셨으며 흠전을 털어서 소 서른 두 마리를 사서 백성에게 나누어준 선정과 덕행을 기리고저 하는 것이다.

『그 소가 크고 자라 저 남쪽 밭이랑에 왔네. 강 부사가 은총 베푼 지 일곱 해 뒤 저 언덕에 입술이 검은 소, 뿔 없는 소, 암소, 숫소들이 있어서 밭갈이 그치지 않으니 오직 그의 두터운 덕이로세』

 

(백우비명은 당시 예조판서를 지낸 황경원이 지은 것으로 백우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사 팔 우

 

복사꽃 승평골에 가득 핀 봄에

어느날 부사 행차 깃발이 나부끼네

내려올 때 마을마다 보릿가실 한창이라

창생은 때를 만나 즐거워 하건마는

역질이 지나간 마굿간마다 농사지을 소가 없어

태수(부사)의 마음에는 근심걱정 짙어지네

농심독려 지성이라 월급미로 소를 사서

골골이 나눠 주고 묵은 밭을 갈게 했네

이렇게 애쓰신 일 한 때 일로 끝나리오

이 마음 영원토록 승평에 머물지니

해마다 새끼 낳고 그 송아지 자라나면

가난한 백성들이 태수(부사) 은혜 입게 되네

뉘라서 잊으리오 우리 부사 높은 은혜

바라노니 이 뜻 깊이 잊지를 말고

부사의 끼친 사랑 가슴마다 간직하세

 

이 글은 조현범이 지은 글로 <강남악부>에서 발췌한 것을 백우탑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강 남 요

 

생각컨대 지난 해 오월 보름날

정기를 앞세우고 강남으로 떠날 제

 

임금은 보내심을 아쉬워하며

별도의 조서로 가까이 부르시어

활에다 살통에다 호초까지 내리셨네

 

내전의 보배받고 크나 큰 영광이라

문석 아래 두 손 받들어 아홉 번 조아렸네

 

감격의 눈물은 옷자락을 적시고

우러르니 용안은 칠순이 되셨는데

임 두고 떠나는 마음 견딜 수가 없었네

 

어언간 한 해 지난 남녘 땅에는

연자루 호반에 석류꽃이 붉었구나

 

금년 오월 보름에는

한가로이 말에 올라 완산으로 가는데

석양의 마치령서 북쪽 하늘 바라보니

홀연히 서울에서 옥서 내려 주셨구나

 

글 가운데 하는 일 자세히 물으시고

신의 이름 전해 들으셨다는 옥음도 있으셨네

 

이 몸은 천하기가 벌레 같은데

어쩌자고 성은을 한 몸에 입었는고

 

한가로운 시골에서 옥서를 받고 보니

생각없이 성총을 잊을 뻔 했구나

 

돌이켜 생각하니 이 날이 무슨 날고

지난 해 어전 떠날 인사 올린 날

 

뫼셨을 때의 어향은 지금도 옷 소매에 따뜻하고

하늘 끝까지라도 성총은 미치리니

간 곳마다 내린 은총 모두 다 영광일세

 

구중에 계신 님은 무강하온지

옛날에는 선장 곁에서 뫼시었건만

 

별과 달이 바다 위에 뜨는 밤이면

옥루 찾는 꿈길이 멀기도 하네

 

아득할 손 옥루는 어느 곳인가

매 한 마리 사라져 가는 아득한 북쪽

 

부르는 내 노래여 길이 전해져

남국의 이 곳에 빛이 되어 남으소서

 

(이 글은 강필리 부사가 직접 지은 글로서 백우탑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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