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대구는 많이 다녔지만 이번에 광주-대구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대구 근대문화골목 답사하였다.〈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선생의 생가를 간다는 것이 가슴 설레인 일이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가슴 속을 울리는 한 맺힌 시(詩)이기 때문이다.

  이상화선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큰아버지에 의해 공부하게 되었다. 열아홉 되던 대구에서 친구들과 함께 3·1 만세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밀정의 추적으로 주요 인물들이 잡혀가자 서울로 올라가 은신하였다. 그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홍사용, 이광수, 최남선 등 문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동경(東京)에서 2년간 프랑스문학을 공부하였으며, 유학 중에도 틈틈이 작품 활동을 하여 국내의 잡지사로 송고하기도 하였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나자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려 일본인 폭도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겪었으나 극적으로 어느 일본인의 배려로 살게 되었다.

  그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출한 저항정신이 강력하게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지만, 봄이 되면 민족혼이 조국의 대자연과 함께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나라는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의 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을 일제에게 강력하게 저항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문(文)의 힘이란 무(武)의 힘보다 무섭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잘 알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 나라가 무엇인가를 알기도 전에 나라를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배우고 나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으니 얼마나 훌륭한 시인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집 바로 앞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서상돈선생의 고택이 있다. 그는 지물(紙物) 및 포목상을 시작하여 상당한 재벌로 부상하였으며,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수호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하였고,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보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한 민족 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일어났다는 것이 훌륭한 일이었다.

  광주 양림동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거주한 곳이 많이 있는데, 대구에도  1910년경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거주했다던 주택이 자리 잡고 있다. 대구시 유형문화제인 이곳은 튼튼한 콘크리트로 그 위에 붉은 벽둘을 쌓아 올렸는데 이러한 건축 양식은 외국에서나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청라언덕은 ‘동무생각’으로 유명하다. ‘청라’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인 푸른 담재이 넝쿨이 우거진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은상선생이 작사를 하고 이곳이 고향인 박태준선생이 작곡한 ‘동무생각 노래비’의 노래를 보면 “봄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 꽃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던 길은 대구 제일교회 옆에 위치한 계단은 ‘대구 조선 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던 길’이라는 90계단이다.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대구의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녔던 길이어서, 우리도 이곳에서 만세삼창과 동무생각을 부르니 마음이 후련했다.

  90계단을 다 내려가 길을 건너면 보이는 곳이 계산성당이다. 프랑스 신부에 의해 설계된 계산동 성당은 1902년에 완공되었는데 중국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그래서 주변으로 화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어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다. 광주에도 차이나타운을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구 약령시는 조선시대부터 국가에서 설립한 곳으로 전국 3대 한약재 전문시장으로, 세계적인 한약재 유통의 거점이며, 우리나라 한방을 대표하는 곳으로 한의학박물관이 있어 직접 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전시, 교육, 관광이 어우러진 곳이다.

  서문시장은 전통시장으로 조선 중기부터 형성된 시장으로, 서문시장의  이름은 대구장이라고 한다. 대구장은 조선시대에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전국 3대 장터 중 한 곳이었는데 사람들이 많고 먹을 것도 풍부하여 대구에 가면 한 번 들릴 만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원군으로 왔다가 귀화한 장수 두사충의 유적지가 있다. 당나라의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후손인데, 두보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두시언해가 두보의 시이다. 두사충은 명나라 유명한 풍수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두릉두씨의 시조이지만, 시간이 없는 관계로 가 보지를 않았지만 다음에 갈 예정이다.

  이번 고속도로 개통으로 광주에서 대구가 훨씬 가까워졌으므로 왕래를 자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북으로는 자주 다니면서 동서로 다니지 않는 것은 국가 발전에도 좋지 않다. 대구 근대문화골목을 답사하면서 느낀 점은 우리 광주는 대구에서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6년   1월  6일

 

      강원구 호남문화관광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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