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 대구와 경북이여, 대한민국 재도약의 선봉에 서라!” 두 번째 글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이병철 회장과 이재용 회장

나는 글을 돈을 받고 쓰지 않는다.

나의 글이 눈물의 소산으로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론적인 글은 쓰지 않는다.

이론은 다 안다고 치고, 그것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할 것인가에만 집중한다. 네이버만 잘 보아도 하바드 대학교 도서관을 하나 지고 다니는 것과 같다.

세상의 승부는 몇 가지다.

상상력과 감수성, 그리고 진정성과 통찰력이다.

결국 누가 더 세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가가 관건이다.

나는 어느 지역의 발전전략을 논할 때, 꼭 그 지역의 선술집에 들러 홀로 술을 마신다.

땅의 기운도 맡아보고 영감이 떠오르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구 경북 발전을 논하고자 하면서, 내가 찾은 곳은 경남 진주시 지수면 압사리에 있는 지수초등학교다.

학교 뒷산을 보고 걸으면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강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나는 하루를 보냈다.

함양에서 일어나고 있는 농촌유토피아 운동도 매우 흥미로워 발길을 옮겨야 했으나 진주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수초교는 흔히 말하는 닭이 달걀을 품은 형세의 날개 쭉 지에 있는 학교다.

이 학교는 삼성의 이병철 회장, LG의 구 회장 네, GS그룹의 허 씨네, 그리고 효성의 조회장 등이 다닌 학교다.

이병철 회장은 1910년생이다.

어려서 할아버지가 세운 서당인 문산정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 등을 배웠다.

지수공립보통학교를 3학년으로 월반해 들어가 다녔고, 4학년 때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 보통학교로 전학 갔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 정치경제학과를 다니다 배울 게 별로 없다고 중퇴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늘 폐 쪽 건강이 안 좋아 고생했다. 삼성가분들은 건강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1926년에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 4녀 박두을과 결혼했다.

대학시절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켜 준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병철은,

몸이 안 좋아 고향에서 요양하던 중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집안의 머슴들에게 전별금까지 주어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그 뒤 고향에서 특별히 할 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노름판에 빠졌다. 밤 새 노름판에 빠져 달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와 마찬가지로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3명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병철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밤을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별 말없이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마침 너의 몫으로 연수 300석의 재산을 나누어주려던 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 보는 것도 좋다.”

그는 마산에서 도정공장과 정미소를 운영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중일전쟁의 여파로 망했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나, 행정적으로 일본 본토와 같은 취급을 받았고, 형사법상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있을지언정 지역에 대한 행정적 차별은 없었다.

이병철의 본격적인 사업의 시작은 지금의 ‘삼성물산’이 하는 일과 비슷했다.

1938년 29세에 30,000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서 <삼성 상회> 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6·25 전쟁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무렵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 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뛰어들었다.

이병철 회장이 삼성이라는 우리나라 국가경쟁력 순위를 훨씬 앞서는 대기업을 일으킨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그는 사람을 매우 중시했다. 인재 경영이 그가 일관되게 실천한 경영 제일 이념이었다.

둘째 그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뜻을 바로 세우고 그 뜻을 이룰 전략을 잘 마련해야 하며, 전략 실현을 위해 투자할 돈과 사람 등 수단을 명확히 할 것"을 자신에게 부터 주문했다.

그는 오늘날의 큰 경영이론인 ‘목적함수와 수단 매체의 합의 일치’를 위한 동시적 준비와 실행을 한 분이다.

그는 남보다 먼저 깨달아야 한다고 늘 책을 읽고,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일본을 연구했다.

■우리는 늘 결단을 요구받고 있다. 머뭇거릴 시간은 없는 것이다.

결단을 하기 전까지는 잠 못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선택을 하면 바로 실행하여야 한다.

전략 수립에 촘촘한 감각을 이병철 회장이 가졌다면, 보이는 매를 낚아채는 과감한 돌진은 정주영회장이 일품이다.

매는 하늘을 날다 먹이가 보이면 아무런 주저 없이 수직 낙하한다.

일은 햄릿은 못한다. 공무원들이 일을 못하는 이유다. 일은 돈키호테만이 할 수 있다.

두들기고 두들기고 두들기다가 결국 강을 건너지 않는 공무원이 무슨 일다운 일을 한단 말인가.

그러다 그들은 선거를 의식하고 시간에 쫓긴 나머지 똥 볼을 차버린다.

매가 먹이를 보고 본능적으로 낙하하는 것이 아니고, 일부러 마음먹고 낙하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번에 윤석열 후보가 김종인 선생과 이준석 대표를 만나 결판을 지은 것은 정말 잘 했다.

오늘 국회에서 열린 <민생과 국익을 우선하는 탄소 중립에너지 정책 제안> 모임도 중요했지만, 이준석 청년을 칭찬하고 소주 한잔 나눈 것은 정말 잘 했다.

‘나라를 살리는 에너지 정책’은 내가 30분 만 잘 설명해도 핵심과 맥락을 다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존심을 버리는 자가 이기는 것이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자존심을 버리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재명 후보가 탈 원전정책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는 눈치는 비상하나, 대의는 없고, 말은 수시로 바꾼다.

그에게 탈 원전은 독이 든 성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쳐 버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탈 핵 무당들을 미워하며 욕을 결국 하게 될 것이다.

“병신 새끼들, 내가, ‘2050 탄소중립!’ 거짓말로 점철된 그 서류를 확 찢어버릴 것이야. 쪼다 같은 병신들 육갑을 해 놓았네, 민주당 문 정권 이것들은 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산 친구들 아니어.

더하기 빼기도 못한 것들이 무슨 국회의원은 국회의원 이어. 양이원영·우원식·김성환 너희들은, 독일 일본에서 하다가 철 지난 반핵 탈 핵운동 글들을 보고 미쳐 날 뛴 것 아니어. 너희들은 도대체 어디서 굴러 묵다 국회의원 되었노? 병신들 지랄한다.”

■나는 ‘三省 家’를 대구 경북을 살릴 수 있는 첫 번째 협력 파트너로 설정하고자 한다.

나의 국토균형 발전을 향한 집념은 물불을 안 가린다.

지역도 대상도 안 가린다. 시대적 소명이기 때문이다.

수도권 비만 지방 빈혈, 이 불균형은 치유되지 않으면 국가 경쟁력은 제고할 수 없다.

다른 이들은 제도나 정책들이 잘 못 되었거나 어찌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하는 데 나는 꼭 그렇게 보지 않는다.

특히 대구 경북과 광주 전남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묻고 싶다.

자기 지역을 서울이나 수도권보다 더 발전시키기 위해, 자식들 일류대학 보내려고 애쓰듯 노력을 진정으로 해보았냐는 말이다.

지역발전을 중앙정부가 해줄 수 있는 것인가.

‘자립,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만이 지역을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먼저 지역이 각성하여, 서울이나 수도권보다 더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필요하다.

나는 광주전남이나 대구 경북의 정치인이나 자치단체장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알 수가 없다.

정주영 회장의 말처럼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프론티어나 파이어니어’로서 한판 싸워보려고 마음이나 먹어보았을까?

뜻이나 세워 보았을까?

다음 글은 대구 경북 발전을 통한 지역균형 발전목표 달성의 실천적 대안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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