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갈등은 해소하고 공존과 포용의 세상을 만들자”
(‘기독교 팔복사상에 비춘 한국 홍익사상 재창조의 길’3)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이타심’의 위대함과 중요성

지금 한국 사회가 휘청거리지 않고 주저앉지도 앉고 앞으로 나가는 길은 ‘겸양과 존중의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함에 있다.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는데 있다.

공자의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않는다.’(己所不欲 勿施於人)에 있다.

성경에도 나온다. Do to others as you would be done by.

우리는 늘 처세의 제 일 원칙인 이 말들을 잊는다.

늘 자기에게는 관대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엄하다.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이고 개 눈엔 똥밖에 안 보인다.’는 말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一切唯心造’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

좋은 것을 지어내는 그 마음, 좋은 세상을 만드는 그 마음의 핵심은 무엇일까?

넓게는 사랑이지만, 핵은 ‘이타심’이다.

대통령을 뽑을 때도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도, 집안에서 사위나 며느리를 들여올 때도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이타심이 강한 자를 뽑으면 된다.

친구를 사귈 때도 그렇다.

■이타심은 관계를 아름답고 성스럽게 하는 妙藥이다.

이 세상에서 가강 강한 이타심은 모성이다. 이타심은 희생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극적이고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 어떤 문명도 희생의 역사를 거치지 않고 성립되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성서의 가르침도 다 이타심 함양이 궁극적 목표다.

교육도 가장 큰 목표는 마땅히 이타심을 키우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 국가에 헌신하는 군인,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 순교자, 물에 빠진 사람을 위해 제 목숨을 내놓는 구조대원!

인간의 역사는 희생의 이야기들을 자양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신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삶이 공허할 때는 살고 싶은데 힘이 다 빠질 때에는 강재구 소령과 고려대 이수현 학생을 생각한다.

아무리 다른 사람을 구하고 싶어도 자기 목숨을 우지끈 꺾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죽비로 나의 머리를 때린다.

나는 아직 한참 먼 놈이다.

" 언제나 너는 사람이 되어, 꽃답게 죽을래?"

음악에서 영화까지, 문학에서 그림까지 모든 예술이 희생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인류는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 애도하고, 보다 본질적인 질문 앞으로 다가선다.

지금껏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문명은 희생의 역사가 없었다면 잉태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타적 행동으로 구현되는 희생정신 없인 인간이라는 존재도 미미한 생물에 불과하다.

희생이야말로 인간 조건의 핵심이다.

우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등장하는 희생의 사람들을 보며 인간이 뼛속까지 자기만 아는 동물은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는 모두 근본적으로는 이타주의자들이며 타인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자신에게 귀한 것을 타인을 위해 내놓는 행위에서 우리가 사는 이유가 존재한다.

어쩌면 이러한 인간성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애초부터 타고난 고통의 증표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고통을 피하고 싶어도 누군가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다면 우리라는 존재를 완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원래는 사회의 계급도 희생을 중심으로 편제되게 되어있다. 전쟁에서 죽어야 하는 군인, 국민이 피를 흘리는 것을 막고 땀을 씻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인을 우러르는 이유다.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연원이다.

이타주의가 궁극적으로 구현된 모습이 희생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모두가 기필코 희생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각각 처한 환경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이타적 행위는 다양하다. 또한 그 일상의 실천들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사는 동안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의 핵심이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이기심에 바탕을 둔 분노의 경제, 승자 독식의 경제, 우리 세대만을 위한 경제를 끝내고

이타심에 바탕을 둔 긍정의 경제, 이타의 경제, 미래세대를 위한 경제로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자크 아탈리의 말처럼 ‘이기적 이타주의’가 세계 경제위기를 풀 열쇠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양조장, 빵집 주인의 자비심이 아니라 그들의 개인적 이익추구 때문”이라는 국부론의 대표적 문장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그것은 아담스미스의 반쪽만 이해한 것이다.

그의 ‘이기심’은 역설적이게도 ‘이타심’에 기반한다.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당시 교회를 비꼬는 표현으로 딱 한번 사용됐을 뿐이다.

애덤스미스는 타인의 이익에 기여하는 건전한 이기심만을 옹호했다. 니체가 말했던 이기심이 이타심이고 이타심이 이기심인 높은 고지를 보았던 것이다.

개인의 이기심이 어떻게 사회적 공익으로 귀결되는 지를 애덤스미스는 두 번째 저작 ‘도덕적 감정론’에서 인간을 공정성과 자비를 추구하는 자로 묘사함으로써 속내를 표현하고 있다.

스미스 국부론에서 언급한 이기심은 현대사회의 개코같은 탐욕적 이기심이 아니다.

절제, 사랑, 공정성 같은 가치가 이기심과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한 사회가 된다고 표현한다.

또 용기와 희망이 보태져야만 혁신이 일어난다.

그래서 매클로스키라는 학자는 이기심이 사랑, 공정성, 용기, 희망, 믿음, 절제에 의해 잘 다스려지는 것이 진정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상적인 사회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내년 3월 들어설 윤석열 정부는 공정과 상식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는 정권이다.

나는 여기에 긍정과 이타를 더 붙이고 싶다.

노조문제 등을 투쟁의 관점으로 봐서는 해결방안이 없다.

우리는 보다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해야 한다. ‘긍정경제 싱크탱크’를 만들어야 한다.

성장에 방점을 찍되, 투자를 통한 생산의 증가를 추구하되 진보적 정신을 가미해야 한다.

‘左道右器’다.

목표를 이타심에 바탕에 두고 설정하면 제로 섬 게임 양상이 완화된다.

■민주주의와 시장을 접목하는 2차원적 접근에 머물지 말고, 장기적 비전이라는 요소를 하나 더 추가하면 긍정경제의 뼈대를 잡을 수 있다.

“긍정적 기업이라면 경영진, 근로자, 주주의 행복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고 마음먹으면 된다.

“우리는 미래 공동체에 유용한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 전사이다.” 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기업들이 실적에만 눈먼 싸움을 끝내고 장기적 경영을 하도록 유도하고, 기업의 장기 투자에 불이익을 주는 현행 회계 기준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크라우드펀딩을 제한하는 각종 규제를 혁파하는 구체적인 액션플랜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미래 세대를 생각하는 이타주의가 오늘날 시장경제를 지배하는 개인주의보다 더 강력한 개인 행복 증대와 사회개선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두 가지의 사례가 있다.

대학 디자인과 졸업반 학생들의 강의를 하면서 그들에게 “당신들이 이 고된 디자인 작업을 남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거나 불편함을 해소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디자인이 지겨웠던 학생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즐겁게 공부하고 큰 만족을 얻어가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다.

유태인은 직업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 사역이라고 여긴다.

창조의 기쁨을 얻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개선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큰 도구와 기회가 직업이다.

코로나 백신을 왜 유대인이 거의 다 발명하는 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13살 때 자신의 맨토를 모시고 맹서한다.

랍비를 모시고, ‘티쿤 울람’이라는 의식을 지낸다.

“저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타인의 아픔과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쓰여 지는 도구일 뿐입니다.

신이여! 모든 분들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분들이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제가 쓰여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제발 그만 좀 일을 하라고 해도 밤을 새워 일을 하고 연구를 한다.

쌀쌀한 날씨 건승하시길 빕니다.

(2021. 11. 26. 05.11. 물봉 신 광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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