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을 죽도록 하다 떠난 지혜로운 삶을 산 분들!”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나는 하기 싫은 일은 億만금을 준다고 해도 안한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은 누가 아무리 말려도 한다.

돈키호테의 묘비명에, 세르반테스는 이렇게 썼다.

“죽는 순간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미친 듯이 하며 살다가, 죽을 땐 현명하게 죽은 사람”이라고.

나는 젊은 시절 한 때, 역사에서 3대 바보는 ‘예수, 돈키호테, 그리고 나다." 라고 비망록에 적어 놓고 살았다.

한 참 뒤, 스티브잡스가 나타났다. 자기도 넣어달라고 떼를 썼다.

“배고픈 존재로 남아라. 바보스러운 존재로 남아라!”( Stay hungry, Stay foolish!)를 들고 왔다.

직권으로 안건을 상정하고 넣어주었다.

오늘의 과제는 돈 씨 집안에 누구를 또 넣을 것인가? 다.

참 바보처럼 살고 싶었다. 훗날 이 정신이 히피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히피들이 머무르며 춤추고 노래하던 마을 곳곳에는 “Stay hungry, Stay foolish!" 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의 프로티어들은 유태인 출신이 많다. 또 한 축은 격식 파괴의 히피정신이다.

오늘밤은 윤동주의 ‘별 헤는 밤’ 詩에서처럼 한국 원자력계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이름을 한 분 씩 불러봐야겠다.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는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이다.

어머니는 박정희(1917∼1979) 대통령이다.

부모가 얼래설래 없는 돈에, 조리장수해서 유학 보내고 키운 자식들이 참으로 훌륭하게 커주었다.

앞글에 소개한 이창건 박사(1918∼ ), 서경수 박사(1936∼1987), 과기처 장관을 두 번 지낸 정근모 박사(1939∼ ), 한필순 박사(1933∼2015), 장인순 박사(1940∼ ), 김병구 박사(1943∼ ) 신재인 박사(1942∼) 등 누구는 넣고 누구는 뺄 수 없을 정도로 쟁쟁한 과학자가 한두 분이 아니다.

이 분들이 한국 원자력 산업을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오로지 애국심 하나였다.

개인만을 생각했더라면 미국에서 시민권 얻어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었다.

배고픈 유학 시절 차디차게 식은 햄버거 한 조각으로 허기를 달래면서도, 어머님께서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 하얀 종이에 곱게 싸준 태극기를 다시 보며 마음을 잡았다.

그들은 “과학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 국적은 있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

원자력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내가 "탈원전은 망국으로 가는 지름 길"로 斷定을 내리고 저지하기 위해 결사 투쟁하는 것도 그분들이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흘린 순정의 눈물, 세상의 등불이 되기 위한 진정의 땀이 자꾸만 떠올라서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미친 작자가 아니라면, 탈원전 정책을 추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신이 나가고 돌아 분 자 들이다. 逆賊들이다.

오늘은 원자력계 정통파 분들하고는 걸어온 길이 조금 다르지만, 한국의 원자력 발전과 핵무기 개발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 서있어,

늘 관심의 대상이었던 이휘소박사(1935∼1977)의 얘기를 꺼내볼까 한다.

이휘소 박사는 뛰어난 과학자였다.

과학계에서는 그가 20세기 전 노벨과학상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는 미국 어느 학회에 참가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게 된다.

이를 두고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고 소설 등도 나온다.

이는 추측일 뿐이었다.

그는 핵무기 개발에 관여한 바가 없었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이용후의 죽음은 사실에 바탕을 둔듯하지만 그야말로 픽션이다.

또 어느 작가는 박 대통령과 이휘소의 편지까지 창작하여 교류시키며, 사실로 믿지 않을 수 없게 소설의 태가 전혀 안 나는 소설을 썼다.

■논픽션 이휘소

비운의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의 진짜를 아십니까?

1977년 교통사고로 4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이때까지 업적만으로 그는 물리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또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젊은이가 드물 정도로, 유명한 과학자였다. 과학자가 개그맨 이휘재보다 훨씬 더 알려졌으니, 할말 다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풍문에 따르면, 이휘소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우리나라 핵무기 개발에 앞장 선 용감한 과학자이며 애국자이다. 그의 죽음에는 미국 정보기관 CIA가 관련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이휘소 박사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고려대 물리학과

강주상 명예교수에 의하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이론은 1970년대 미국 대학생의 졸업논문에 핵폭탄 설계도가 실릴 정도로 공개된 정보였다.

다시 말해 핵무기의 설계는 학부 과정의 학생도 손쉽게 그릴 수가 있었다.

후진국인 파키스칸도 핵무기를 만들었고, 미얀마도 핵무기 제조에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원자력 發電所 건설은 전 세계에서 미국 러시아 불란서 한국 중국 일본 만 할 수 있으니,

원전 건설과 발전이 핵무기 제조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면, 원료가 되는 ‘농축우라늄’ 확보가 관건인데, 이는 이휘소 박사 전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휘소 박사의 죽음에 미국의 정보기관이 관련됐다.’ 식의 음모론도 그의 학문적 평가에는 관심이 없고, 그를 관심 유발의 대상이나 소재로 삼아 소설가적 상상의 나래를 편 것뿐이다.

한림과학기술원은 지난 2006년 이휘소 박사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하지만 이휘소 박사가 연구했던 주제나 연구내용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나의 동창생 중에 정오차가 있다. 바윗돌이란 노래를 불러 대학가요제에서 상을 받았다.

그 친구의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난 이휘소 박사를 생각한다.

혹시 이 동요를 아는가? “바윗돌 깨뜨려 돌멩이, 돌멩이 깨뜨려 조약돌, 조약돌 깨뜨려 자갈돌, 자갈 돌 깨뜨려 모래알.....”

이휘소 박사의 전공은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작게 쪼개진 알갱이, 즉 소립자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보여주는, ‘高 에너지 소립자 물리학’이다.

이휘소 박사의 업적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게이지 이론’의 재 규격화다. 1972년 미시세계 현상을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기초 이론을 실험을 통해 검증해 낸 것이다.

이로 인해 미시세계의 현상을 의미 있는 이론값으로 계산 할 수 있었고 실험으로 확인이 가능해졌다.

둘째는 ‘참’(Charm) 입자의 탐색이다.

1970년대 K-중간자의 희귀 붕괴과정에서 새로운 참 쿼크가 예견됐는데, 이휘소 박사는 참 쿼크의 탐색방도를 여러 방면에서 제시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1974년 11월 실제로 새로운 입자의 존재가 발견됐다. 이로 인해 이휘소 박사는 단순히 유명한 ‘이론 물리학자’에서 더 유명한 ‘현상론 물리학자’가 됐다.

이러한 업적 때문에 그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강주상 교수는 이휘소 박사가 생존했다면 1999년 노벨상을 수상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벨상은 최대 3명까지, 2개 분야 이내에서 시상하는 제한 조건이 있고, 한번 수상한 주제는 다시 시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이 조건으로 볼 때 이휘소 박사는 참 이 분야보다 게이지 이론의 재 규격화로 노벨상을 탔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휘소 박사와 친교나 우정을 나눈 한국인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경기고 선후배 관계인 정근모 박사와 서신을 나눌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두 분은 천재에 가까운 수재였다. 경기고를 다니다 2년 만에 더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로 진학을 했다.

1999년 게이지 이론 연구를 수행했던 벨트만과 토프트는 1999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 이론의 논리체계를 확실히 한 이휘소 박사가 생존했다면 1999년 수상자 대열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다’는 점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강조해야겠다.

<핵물리학자 이휘소>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나오는 것처럼 사망 즈음에 노벨상 수상을 목전에 뒀던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가 아닌 인간 이휘소의 모습

내가 보기에는 이휘소 박사 역시 우리 돈 씨(돈키호테) 가문에 들어와야 한다.

‘예수, 돈키호테, 스티브잡스, 이휘소, 물봉’등이 돈 씨 가문이 배출한 주요 인물이다.

미쳐서 하고 싶은 일을 아이처럼 하다가, 죽을 사이도 없이 현명하게 떠난 사람들이다.

이휘소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물리학에만 매달인 사람’ ‘가정에 충실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이휘소 박사의 동료들은 그를 ‘히프에 종기가 났다가 대접도 못 받고 의자에 문드러지고, 팬티가 썩은 사람’으로 불렸다고 한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를 떼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는 생활 습관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한 번은 이휘소 박사가 동료와 점심을 먹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연구실로 들어가더니, 이틀 만에 앉은 자리에서 한 편의 논문을 완성했다고 한다.

물봉과 정확히 닮았다.

내가 사흘 밤낮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쓴 글이 광주문화도시 만들기의 모든 것이 쓰여 진 <문화광주2020 계획서> 다. 그 글을 다 쓰고 나니 코피가 터졌다.

작성한 서류 표지에 코피가 장미처럼 피어올랐다.

나는 새벽 길거리를 소리치며 질주했다.

'문화국가론 백범, 문화도시 광주, 문화도시론 물봉'

이휘소 박사의 좌우명은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였다.

그것은 단순히 남에게 뒤지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남이 알아낸 것을 뒤쫓아 가는 연구가 아니라 스스로 물리학의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는 선도적인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물봉과 똑같다.

아쉽게도 이휘소박사의 노벨상은 사라졌지만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물봉의 ‘삶의 바켓리스트’ 52번째는 한국인 노벨상 수상자 배출에 일조하는 것이다.

거지가 되기 전까지는, 싹수가 파란 자를 골라서 그가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외국에서 발간된 좋은 책을 사주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나는 늘 스폰서가 되고 싶은 꿈을 꾼다, 그러나 돈이 없다.

내가 슬픈 것은 내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나의 아름다운 꿈이 돈으로 꺾여버려서다.

이휘소 박사가 활약하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게 많은 한국 과학자가 세계적인 업적을 잇달아 내고 있다.

내가 관심이 많은 현씨 집안의 경북 출신 현 정택 교수와 굴비의 고장 전남 영광출신의 김 빛나리 교수가 상당히 유력하다는 것을, 그들의 논문을 사흘 밤을 새워 낑낑거리고 읽으면서 알았다.

한국 최초로 과학 분야 노벨상을 수상해 이휘소 박사가 “허허∼”하고 웃게 될 날이 머지않은 미래에 올 것이다.

그날은 테스 형 나 훈아 선배도 부를 것이다.

“테스 형! 노벨상 하나 타기가 왜 이리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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