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易地思之가 없는 글은 글이 아닙니다.”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진실일까요?

저는 글 표제가 말하듯이 한국의 원자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강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이를 위해 애쓴 분들의 눈물겨운 사연을 밝혀볼까 했습니다.

그러다 잠시 다른 주제를 하나 다뤄보고, 그 시리 디 시린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쓰기로 했습니다.

지금 ‘원자력’만큼 국민들 사이에서 혼란이 오고 서로 간에 의견이 갈라진 토픽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없애지 않으면 큰 일 난다!’ 고 하고, 다른 이들은 ‘우리는 앞으로 원자력으로 산업을 키우고, 후손들은 키우고 먹고 살아야 한다.

千載一遇 기회가 찾아왔다.' 라고 말합니다.

둘 다 맞을 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는 맞고, 하나는 詐欺입니다.

작년도 일 년 내내 政局을 흔들었던 윤석열, 최재형에 대한 시시비비도, 지금 김영록 전남지사의 목줄을 쥐고 있는 ‘신안해상풍력 발전’문제도 다 원자력에 대한 판단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이 세상은 에너지가 없이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그 중요한 에너지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원자력’은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실제의 문제는 ‘원자력을 다른 에너지원으로 대체 가능한가, 不可한가?' 에 있습니다.

저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不可하다고 봅니다.

탈 원전 정책은 구체적 여건과 실질 실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념 도취나 명분 쌓기 정치놀음, 그리고 경쟁 에너지원의 숨은 공작에 의해 세뇌된 착각으로 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해결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에너지 문제는 경제, 복지, 국방, 문화까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통찰적인 시각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문제는 생각의 짧음에 연유합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근원적 원인은 ‘자신들이 잘 모르면서도 아는 것으로 착각’ 하여 용감하게 말과 글을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공적인 관계에서는 정확히 모르는 것, 확실한 標識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과 글을 삼가야 합니다.

사람들을 태우고 가는 배가 어디에서 암초를 만나 좌초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잘 모르겠으면, 확실히 모르겠으면 ‘잘 모른다.’ 하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功名心’, 치명적인 유혹입니다.

아는 척, 잘 난 척하고 싶어 미치겠습니다.

사람들이 사회에 기여하기는 커녕 해를 끼치고 망치는 첩경은 공명심에 있습니다.

첫 번째 비극은 잘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비극은 끝까지 고집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비극은 자기가 무슨 이유로 무엇 하는 줄도 모르고 자존심 하나 때문에 고집하다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제 3자와 세상이 다 헤깔리고 그로 인해 헤매고 불행해지는 데 있습니다.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잘 아는 게 앎의 시작입니다.

착각하는 이들은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기 시작합니다.

자기가 헷갈리고 있는 것을 헷갈리면서 말하니까,

그 말을 듣는 사람이나 그런 글을 보는 사람부터 혼란의 발동이 걸리는 것입니다.

글이나 말은 하는 사람 쓰는 사람이 주도권을 쥡니다.

상당한 분석력과 판단력을 갖지 않는 한, 상대방이 준비한 공격에 설득당하거나 농락당하지 않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진실에만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찌라시 정보에도 헷갈리고, 신문에나 방송에 나왔다면 헷갈리고, 그가 서울대 의대 출신이라면 헷갈리고, 과학자라면 헷갈리고, <원자력안전과 미래>라는 그럴듯한 타이틀을 갖고 있는 대표라면 헷갈리고, 소설과 영화가 많이 팔리고 관객이 몇 백만이 보았다면 헷갈립니다.

한국인만큼 잘 헷갈려 버리는 국민은 없습니다.

늘 우리는 광화문 ‘광우병 소동’을 생각해야 합니다.

대부분은 “우리는 뇌 구멍 숭숭, 미국산 소고기 햄버거는 싫어요." 라는 정서적 요인에 굴복합니다.

중심을 잘 지켜야 할 언론까지 부화뇌동에 앞장섭니다.

언론 역시 선제공격 능력이 있어 스스로 양식을 지키지 않는 한 사회의 흉기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이를 이용합니다. 연극이 끝난 뒤에는 허무와 손실만이 낙엽처럼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늘 술 마시게 합니다.

저는 이 나라는, 사실과 과학을 결여한 찌라시 풍문으로 망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부쩍 하곤 합니다.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분들은 대통령부터 영화와 소설과 현실을 늘 혼동합니다.

영화를 만든 이들과 보는 분들 모두 합심해서 사실을 떠나 영화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오늘날, 탈원전으로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판도라’ 영화 한 편 때문이 맞습니다.

지금도 문재인 대통령이나, 그 날 영화를 같이 봤던 분들, 그리고 탈핵 운동가들은 판도라 영화의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부터는 가짜인줄을 잘 모를 것입니다.

광주 5·18을 다룬 ‘화려한 휴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의 결정적인 장면, 공수부대원들이 시민군을 향해 조준 사격을 하는 장면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양심적인 영화제작자는, 영화 시작 전 영화가 픽션인지 논픽션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물론 영화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흥미를 배가시키면서 스토리텔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영화적인 작업으로도 픽션을 논픽션으로 착각하게 할 자유나 권리는 없습니다.

탈원전을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과 과학이 아닌 거짓말로 탈원전을 糊塗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의 글에는 논문으로 발표되어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않는 글은 탄생 된 글로 보지 않습니다.

私見일 뿐입니다.

그런 글에는 '나의 생각으로는', 'In my thought'가 단서처럼 붙어 있습니다.

주장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 나라를 최대한 혼란 시키고 있는 ‘원자력’ 정책 문제는 몇몇 분들의 비논리적 비과학적 비사실적 접근 방식과 태도, 이를 받아들이는 국민들의 의식과 행태문제에서 파생한다고 봅니다.

■저는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특이한 기질이 있습니다.

졸업식이나 학년이 바뀌어 헤어져야 할 때, 근무지를 옮겨야 할 때,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동리 댁 할머니와 논정 댁 엄니로부터 받은 유전적 형질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이 정이 많다는 것은 무척 살기가 힘듦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정 주고 내가 우네.’를 부르며 너무나 쓸쓸해 웁니다.

‘봄날은 간다.’는 가슴이 총 맞은 것처럼 뚫리는 것 같아 끝까지 부를 수가 없습니다.

홀로 담배라도 한 대 피우면 눈에 이슬이 맺힙니다.

이 세상에 왜 이리 준비되지 않는 이별은 많은 건가요.

지금도 같이 살고 있는 나의 자식들보다 예쁜 유기견 세 마리와 헤어질 날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멍멍해져 옵니다.

그래서 의리를 끔찍이 지키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헤어집니다.

저는 너무나도 부족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저와 생각과 기질이 비슷한 분을 찾아 그대로 모방하고 삽니다.

그 분을 카피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제가 늘 의지하고 힘들 때마다 찾는 분은 버트란트 러셀입니다. 그분의 사상 중에서 ‘사랑’ ‘연민’ ‘진실’ 세 단어를 찾아 저는 매일 그분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너무나 사랑할 것이 많아, 사랑이 외롭고 힘들어, 그분에 의지합니다.

너무나 보듬고 싶은 것이 많아 그분의 ‘더 깊게 연민할 것’을 때로는 지상명령으로 때로는 위로로 받아들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게 연민하며 산다는 것이 쉬울 것 같은데 실은 만만치가 않습니다.

진실하게 살기는 너무나 힘들고 고달픕니다.

저는 함부로 진실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누군가가 자신을 위하여서만, 자신의 이기심으로만 진실을 왜곡하고 있을 때, 저는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이 대부분 가시밭길입니다.

나는 진실하게만 살고 싶은데, 누군가는 거짓으로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합니다.

담배를 한 대 피울 때마다, 내가 잘 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봅니다.

백번을 생각해도 양심상 외치지 않을 수 없을 때, 허위의식이 확실히 보일 때 저는 싸우러 나섭니다.

돈도 권력도 지위도 없는 자가, 이런 싸움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고행 길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늦가을 날, 탈원전 결사반대 시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날, 홀로 벤치에 앉아 권양숙의 ‘산장의 여인’을 한 곡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테스 형 노래를 들었습니다.

“테스 형, 세상은 왜 이래, 왜 이리 슬퍼, 난 단 하나의 욕심도 욕망도 없이 더 사랑하고 더 약하고 여린 것들 아끼고 진실만을 쫓아 살아가려 하는 데, 세상은 왜 이래? 왜 힘들어?”

저 만큼 테스 형 노래를 심각하게 듣는 이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두 분을 비판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한 분은 <원자력안전과 미래>라는 기업을 운영하면서 원자력 관련 TV 토론 등에 자주 나오는 이 정윤이라는 분입니다.

저는 이분을 허위의식만이 가득한 가짜 인간으로 봅니다.

매섭게 비판하고 싶습니다.

또 한 분은 다른 차원에서의 비판입니다.

김진명이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이분이 쓴 소설 중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있습니다. 400만 부 정도가 팔렸다더군요.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이휘소 과학자의 생애를 조명한 작품입니다.

실화인지 픽션인지가 애매모호하게 알려졌습니다.

최근 제가 몇 분과의 편지교류를 통해서 이 소설은 완전 허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휘소, 이 분이 과학자가 아니라면 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에 큰 몫을 할 수 있는 위대한 과학자였습니다.

이 소설로 인해, 국민에게 올바르고 정확하게 알려져야 할 원자력에 관한 사실과 과학이 오도되었다는 판단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찾는 일이라면, 어느 길이라도 가는 물봉이, 소설의 시작에 앞서 ‘이 소설은 픽션이다.’는 것을 밝히지 않은 김진명 작가의 태도를 비판할 것입니다.

김진명 소설가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사적인 관계에서는 그렇고 공적인 관계에서는 소설이 끼친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겠습니다.

이 정윤 대표는 공적인 측면에서 비난해보겠습니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판단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입니다. 자신이 올바른 생각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줄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私的인 감정에서는 아니고, 흔히 배웠다는 사람들이 무수히 범하고 있는, 일을 한다고는 하고 있으나, 나름으로는 세상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거짓을 돕거나 사회를 망치는 부역의 짓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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