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형 미래 인간과 대답형 과거인간"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탈원전’에 관한 글 잠시 미루고 위 제목으로 글 좀 써야겠다.

날씨는 추운데 국민은 오돌 오돌 떨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를 한다는 자들은 자기들 멋대로 ‘豪氣’와 ‘客氣’를 부리고 있다.

자신들은 자기 생각에 취해, 자신들 월급 값을 한다고 저러고 있을 것이나 나라를 아예 망치고 있다.

모범을 보여야 할 대통령부터 나라를 망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一介 평범한 村夫이지만 나라가 절단난다는 생각에 참을 수가 없다. 몇 달 전 塵人 조은산이 글을 썼던 마음도 이러했으리라.

글의 제목은 함석헌 선생이 자주 하던 말이다.

함선생 보다 10년 전에 태어난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사상이기도 하다. 함 선생보다 27년 뒤 태어난 무위당 장일순과 함께, 세 분은 ‘근대 한국의 생명사상’을 일궜다.

언젠가는 이 분들의 사상을 조명해볼 기회가 있겠지만 내가 지금 다루고 싶은 문제는 난장판 흙탕물이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 몇 두레박 맑은 물이라도 뿌리고 싶은 純情에서 나온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지금 한국 사회갈등의 근원과 양상은 거의 비슷하다. 풀어야 할 나라의 문제가 생기면 정권의 정치적 잇속이 개입한다.

국가의 장래와 국민의 행복을 위해 최선의 답을 내야겠다는 마음은 전당포에 맡겨두고, 정파적 싸움만 난무 해져버리고 국민들 마저 편이 갈리어 싸움질에 합세한다.

다른 정책도 대부분 비슷한 양상이지만 내가 한 2년간 정말 고심한 ‘탈원전’ 정책 문제를 중심으로 국민들에게 보고도 하고 하소연도 하여보겠다.

다 알겠지만 국가의 에너지 정책은 경제 정책의 뼈대이다.

국민들은 잘 기억할 것이다. 60년대 오일 쇼크로 얼마나 국민들의 애간장을 태웠는가를. 그래도 우리 국민들은 오일쇼크가 야기한 경제적 위기를 넘기고 세계 10위권의 경제적 힘을 가진 국가로 부상했다.

한국인의 근면성도 있었지만, 정치 행정을 하는 자와 국민의 생각이 훌륭했던 것이 제일 큰 요인이다.

‘생각-의식- 행동-습관’의 연결 사슬이 잘 작동했다.

우리의 운명을 발전적으로 이끈 것이다. 씨앗은 좋은 생각이었다.

사람은 생각 없이는 의사를 결정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실제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바른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바른 생각만이 세상을 바꾸는 데도 말이다.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 바른 생각이 세상을 바꾸는 메카니즘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번 ‘탈원전’을 둘러싼 大會戰은 문재인 정권과 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등 양심 애국 세력 간의 乾坤一擲 한 판 승부이다.

<질문하는 자·미래지향적인 자·주체적이고 독립적 인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자· 궁금증과 호기심이 많은 자·꿈을 꾸는 자· 조건을 극복하고 도전하고 창조하는 자· 비정치적인 자· 무엇인가를 원하는 자·어떻게 살 것인가를 늘 고민하는 자:

(탈원전 결사 반대파)

vs 대답만 잘 하려는 자· 과거로 회귀하려는 자· 타율적이고 종속적인 자·보이는 것만 보려는 자·아무런 궁금한 것이 없는 자·시키는 대로 하는 자· 조건에 순응하고 현찰만 챙기려는 자·정치적인 자· 감각적인 만족 외에는 별로 바라는 것이 없는 자 (탈원전 맹목추진자) 간에 치열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총장과 추미애 장관 간 싸움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대답하려는 자와 질문하려는 자간의 대결이었다.

윤 총장은 기본적으로 기존 질서에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기존에 하던 대로 하지 않고 사유를 하여 다른 방식을 찾아내면 더 진정하게 다른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언행이, “나는 나를 임명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국민에게 충성하겠다.”는 말이다.

반면 추미애 장관은 기존 권력 질서를 따르고 존중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을 딱 두부모 자르듯이 나눌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정향은 윤 총장은 질문하는 존재이고, 추 장관은 대답하는데 길들여진 존재이다.

우리 사실과 과학 네트워크(공동대표 조기양 최영대 신광조) 는 ‘탈원전’의 문제를 놓고 거대한 권력인 문재인 대통령과 문재인 정권의 관료들, 그리고 민주당 측과 일합을 겨루고 있다.

기어이 이 정책을 철폐시켜야 우리의 양심이 실현되리라는 꿈과 신념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들은 보이는 것만을 보는 자들, 자신들이 편히 사는 길만 찾아다니는 자들로 보고 있다.

그들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제대로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원자력 발전과 방사선이 무섭다고만 한다. 감각적으로만 말한다.

우리 ‘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웍’은 안 보이는 것을 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어이 보려는 꿈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지혜로 원자력 사고를 제로화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기존보다 개선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국민을 해지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보이는 것만을 보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난 일에만 집착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에 미래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가, 또 다시 사고가 반복되는 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우리 사실과 과학 네트워크는 늘 질문자이고, 문재인 대통령과 탈원전 파들은 늘 대답자들 일 뿐이다.

그들은 질문도 궁금한 것도 없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는 2개 세계가 있다.

자연 그대로의 세계와 인간이 만든 세계이다.

내 손에 스마트폰이 있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만들어서 삶을 변화시켰다.

문이라는 한자에는 인간이 만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인간은 생각의 힘에 의해 문화적 변화, 즉 문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크게 나누어보면 두 종류로 나뉜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자와 그 만들어진 것에 순응하여 이용하는 자이다.

전자를 창의적이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 후자를 변화를 수용하는 종속적인 존재로 본다.

전자는 안 보이는 것을 보려는 존재, 안 보이는 새 영토를 건설하려는 존재다. 아직 해석되지 않는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존재이다.

플라톤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고 꿈꾸지 않는 자는 자신의 학숙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간절한 욕구에 의해서 문명을 만들었다.

현상의 세계에서 추상의 세계로 넘어왔다.

실제 인간의 행태를 보자. 자연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다가 머무르지 않고 강을 건너갔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채취해서 먹고 살다가, 씨를 모으고 밭고랑을 갈아 심었다.

문화가 탄생했다. 문화 ‘Culture’는, 경작하는 ‘Cultivating ’에서 나왔다.

인간은 문화적 충동을 갖는 인간이 되었다.

생각해본다는 것이 배고픔을 덜어주었고, 행복해졌다.

지적 활동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도전이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이다. 문명이 실현되는 시작이었다.

감각에만 의존하다가 ‘사유’의 위력이 깊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인간의 노력은 집요했다.

고고학은 어느 나라가 발달했을까?

유적과 유물이 많은 나라일까?

아니다. 고고학은 영국이 가장 세다.

구체적인 유물을 가진 나라보다 보이지 않는 만져지지 않는 지식을 가진 나라가 세다.

제국을 꿈꿔봤던 나라가 세다. 구체적인 것을 설명하는 능력을 가진 나라, ‘學’을 가진 나라가 세다.

선진국은 물적 자산보다 인적 자산 지식자산을 훨씬 더 높게 본다.

현상세계를 접촉하는 것이 감각이다.

추상 세계를 접촉하는 능력이 사유다.

사유가 감각보다 훨씬 세다.

감각의 레벨에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을 기능이라고 한다.

사유의 레벨에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이 기술이다.

감각적 레벨에서 정신적 만족 쾌락을 추구하는 능력을 예능이라고 한다.

사유의 레벨에서 쾌락을 추구하는 능력을 예술이라고 한다.

기술을 보편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게 이론화 시킨 것이 ‘學’이다. 높은 경지다.

삶을 감각적 단계에서 쾌락을 추구하면서, 행복 자유 창의성을 추구하는 것을 아인시타인은 ‘정신분열’이라고 한다.

행복과 자유는 지적 활동에서 오고 정신적 해석의 결과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것에서 보여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 아직 해석되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질문이다.

질문으로부터 높은 수준의 새 가치가 추구된다.

문화적 활동은 대답이 아니고 질문에 있다.

이 세상의 새로운 것 앞선 것 위대한 것 큰 가치는 질문의 결과이다.

대답에 익숙한 인간은 누가 먹었던 것을 많이 뱉어내느냐 빨리 뱉어내느냐 먹었던 것 그대로 뱉어내느냐 에만 신경을 쓴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추미애 장관은 전형적인 대답 형 인간들이다.

미래를 살지 않고 과거만 산다.

과거에 어떻게 했느냐만 따진다.

궁금증과 호기심도 없다.

오직 자기 밖에 있는 유일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노무현에게는 모난 돌이 정을 어떻게 맞는 것인지, 궁금증이 많았다.

문과 추는 이미 알았던 지식을 전달하는 자일뿐이다.

고집의 대가요, 황제인 이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충동이 없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는 자만이 자기 자신이 있다.

니가 너냐? 너는 누구냐?는 질문을 한 번도 안 해본 자가 문재인과 추미애다.

어디선가 본 듯한 다른 사람의 꿈을 대행하고 있을 뿐이다.

질문은 모든 위대함이 터져 나오는 터전이다.

예술은 사유단계 지적 해석 결과이다.

훈련된 지성에서만 나온다.

훈련되지 않는 지성은 이발소 그림과 고호 그림을 구분 못한다.

진정한 예술은 감동을 준다.

감동은 불안정하고 불균형이다. 떨림에서 나온다.

질문을 수없이 던진 사유결과이다.

이것의 원천은 의외성이다. 의외성은 고유함에서 나온다.

다른 사람과 가까이 있지 않는 차별성에서 나온다.

이제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너는 누구냐? 궁금증과 호기심만이 그 사람의 전부다.

그 사람을 그 사람답게 하는 독립성 주체성의 근간이다.

어쩌면 문재인 대통령과 추미애 장관은 이 시대 교육의 전통과 환경이 낳은 최고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어떤 일도 독창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저 일을 하는 흉내를 낼 수 있을 뿐이다.

한국 교육은 제로베이스에서 모든 것을 다 불 지르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대답 형 인간은 이제 아무 쓸모가 없다.

그들은 혁신을 하는 일을 준비하는 회의를 하는 것을 혁신으로, 혁신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을 혁신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다이어트를 하는 책을 읽는 것을 다이어트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모든 다이어트 TV프로그램을 시청한다.

그들은 검찰개혁을 부르짖고 외치는 것을 검찰개혁을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탈원전을 외치는 것을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고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친환경으로 지구를 살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질문이 없었기에 탈원전을 외치는 그 일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전혀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다.

그저 감각적으로 본능적으로 원자력이 무섭다는 영상이 그림으로 뇌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노력을 한 번도 안 해보았다.

국민에게 에너지를 값싸고 풍족하게 공급해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거의 없다.

아이디어도 정책도 없다.

그러다 보니 탑 리더는 느닷없이 탈원전이라는 똥 볼을 차버리면서 국민이 먹을 밥상을 엎어버리고, 총리부터는 눈치만보고 시키는 대로 하면서 월급만 타 먹고 좋은 자리나 여수고 눈만 껌벅껌벅한다.

개인의 고유한 질문에서 비롯된 꿈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감각적으로 본능에 의해 원자력이 무섭고 싫어 쫓아내려고 하고 있다.

사유능력이 없기에 그 결과를 예측할 능력도 없다.

추 장관은 자신을 대장으로 모시지도 않고 말도 잘 앋 들어 기분 나쁘게 하는 윤 총장이 감각적으로 밉고 싫었다.

추 장관은 사유의 능력이 별로 없는 자다.

사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도 모르면서 감각적으로만 사찰은 틀렸다고 판단했다. 강아지들이 먹이를 주는 소리에 침을 흘리는 조건반사적 반응과 비슷하다.

‘사찰’은 무시무시하게 나쁜 것으로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건 하나로 윤 총장을 작살낼 수 있을 줄 알았고 국민이 추미애! 추미애!를 외치며 환호할 줄 알았다.

현재 한국은 거의 대부분 대답 형 인간들이다.

질문이 있는 자가 별로 없다. 한국의 대답 형 인간이 탈원전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고, 금전적으로 만도 앞으로 약 1000조 원 손해를 국가와 국민에 끼칠 똥고집을 부리고 있다.

우리는 질문과 질문을 거듭한 끝에 이대로 나라가 망하는 꼴을 앉아서 볼 수만은 없어, 정해진 대답에만 길들여진 인간들과 모든 것을 걸고 한판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편의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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