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 ‘조선인 학병지원제’ 어떻게 보아야 하나?

인촌 김성수 선생에 대한 친일 여부 논쟁을 벌이다보면, 인촌 김성수 단죄를 주장하는 측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온 이야기가,

‘인촌이 보성전문 제자들을 총알받이로 전쟁에 내 몰았다’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시대 상황에서 인촌이 그런 일을 했거나, 인촌이 그 일에 자발적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촌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인촌을 친일로 몰아 속죄양으로 삼으려는 자들의 전략이 배어있다.

" 혁명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민을 적과 아,피아 구분으로만 단순화시켜 대중의 분노를 자아 낼 숙청대상을 생산하라!"는 빨치산의 수법이 숨어 있다.

일본은 원래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그야말로 가열일로의 전쟁기간 중 병력 증원이 절실했지만, 조선 청년들을 징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태평양 전쟁 막판에 가서 상황이 몰리자, 어쩔 수 없이 징집령(1943)을 내려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시작했다.

징집한 청년들을 일본인 부대에 배속만 시켰지 별도로 조선군을 편성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조선 사람들을 군사교육에다 무장까지 시켜 전투능력을 갖추게 했다가는, 언제 총구를 돌릴지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다.

육당 최남선이 학병을 권유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선의 청년들아 입대하라! 그것도 지체 없이 나가라!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저들은 절대로 우리에게 군사기술, 군사지식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기왕에 입대하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장교로 나가라! 장교라야 고급 군사학을 습득하고 지휘능력, 작전능력을 기를 수 있다.”

3·1 독립운동 등을 주도하였던 六堂 등 33인의 태반이, 훗날 친일파로 몰리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된 일본에 대한 비자발적 협력이거나, 저항적 협력을 하게 된 것은 일본의 패망이 그리 빨리 오지 않으리라는 판단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오판이었다.

일본은 상당 기간 기세 등등 할 것으로 보았고, 어떻게든 우리도 일본을 따라 갈 힘을 기르고 싶은 욕심이 많았다.

육당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파로 부관참시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비난할 것은 일제 순사들의 앞잡이가 되어 완장을 차고 미쳐 날뛴 자들의 인간이하의 행위이지,

"죽어버릴 것이냐 살아남아 버틸 것이냐(to be or not to be) " 선택의 기로에 서서 행한 햄릿형 지식인의 미로의 헤매임은 아닐 것이다.

이완용도 이완용의 입장에 서서 구체적인 행적을 따라가보면 무조건 매도할 수만은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그래도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먹을 것을 많이 챙기고 호의호식 하였으니, 순정하게만 살고픈 나로서는 변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굴복과 타협은 순전히 그 들 개인의 성정과 취향의 문제이다.

나는 이 길로 가는 것이 옳은 삶이라고 생각하니, 당신들도 이 길로 기어이 가야만 한다고 강요도 주장도 할 수 없다고 본다.

애국에 대한 생각과 방식도 모두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요즘에 와서 더 요긴하다.

왜 친일이 매국인가?

을사 5적 등 출세욕으로 똘똘 뭉친 자들을 빼고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나라를 말아먹기 위해 친일한 지식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친일을 반성했던 최린은 단 한점도 부끄러움없이 살려는 순정한 사람이었고,

훗날 일제시대 직책을 지닌 것을 괴로워한 이항녕 교수도 오직 소나무처럼 살고 싶은 결백지사 취향의 다소 특이한 분들이었다.

물고기로 치면 완전 1급수 품성을, 예민한 양심의 촉수를 지닌 분들이었다.

2급수 이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탐욕에 특별히 오염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다른 분들은,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실제로 기여하지 않는 한 그리도 쉽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다 만주벌판으로 독립운동하러 떠나버리면, 소는 누가 키우겠는가?

물론 독립운동가는 훌륭한 분이다. 존경받아야 한다.

그런다고 독립운동을 내놓고 안 한분들이라고 나쁘고 비겁한 삶을 산 사람들이라고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역사의 심판을 받은 많은 이들이, "그 때의 상황에서 그러면 나 어떡해?"하며 항변이나 호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1919년 3.1운동 때 선구자로 나서 죽음을 무릎쓰고 일본과 싸우자고 앞장 섰던 분들이,

1937년 중일전쟁 1941년태평양 전쟁을 지나가면서 변절하였다면, 그래도 말로 표현못할 시대적 상황과 사연이 있었지 않겠는가.

육당의 학병권유 연설을 직접 들은 김붕구 전 서울대학교 불문학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육당의 경우, 일제 관헌과 입회 교수들을 뒤에 앉히고, 그는 거침없이 토로하는 것이었다.

온 세계의 청년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다.

오직 조선 청년만이 편히 앉아 있으라고 둘 성 싶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된다면 전쟁 뒤에 어떤 발언권을 얻을 수 있겠는가?

비단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서 나가라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총 쏘는 법을 배워 두란 말이다....”라고.

김교수님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관점에 따라서는 무책임한 말, 혹은 하나의 궤변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간단명료한 말이며, 그의 진의를 충분히 전달하고 꾸밈이 없는 말이었다.

그 자리에 입회했던 관리와 일본인 교수도 탄복했지만, 그때의 발악적인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는 놀라울 만큼 대담하고 솔직한 표현이었다."

당시 제국주의 물결이 너무나 거셌다.

고종이 나라를 넘겨 분 뒤, 조선은 갈수록 자립의 희망은 사라져갔다.

우리가 의지하는 외세는 사람들에 따라 여러 갈래로 갈리었다.

조선의 힘만으로 홀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안 중근 의사의 ‘대동아 평화론’ 등이 나온 배경이다.

일본으로부터 인도처럼 자치권을 얻자는 현실적 자강파도 많았다. 간디의 노선이었다.

영국과 미국을 털이 난 짐승으로 보는 사람,

러시아나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사람,

그들과 친해지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는 사람 등 등 일본에 대한 생각도 다른 열강에 대한 생각도 다 다르고 제 각각 이었다.

"비겁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승산도 없는 싸움에 무조건 뛰어 들어 목숨을 버릴 수는 없다"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고 보아야 한다.

인촌은 현실적 실용적 민족주의자였고 인간 주의자였다.

밖에 나타난 몸 짓 으로는 몰라도, 내심으로는 학병 징집에 학교의 폐쇄를 당하지 않을 정도로는 초지일관 저항을 했다.

普專 학생들의 조직적인 징집 거부 활동을 말리지도 않았다. 하지말라고 한마디도 안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적성이 군사 분야에 맞다.’고 여겨지면 학도병 장교로 가는 것은 말리지 않았다.

당시에는 학도병 지원을 하지 않으면 강제 징집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촌 선생의 부인 이 아주 여사께서는 학도병들을 보내는 ‘장도 회’ 식장 구석에서 스파게티를 해 먹여 보냈다.

인촌은 한마디만 했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와야 한다. 여기 계신 부모님은 어떻게든 우리가 챙겨볼 테니 걱정 말고 다녀 오거라.”

인촌은 제자들에게 신신 당부의 말을 건네고, 돌아 서서 달구 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 학병 제도에 얽힌 남몰래 흐르는 눈물

1944 년, 조선인 학병 시절, 그 당시로 한 번 돌아가 보자.

1943년 11월 3일, 전쟁이 종반으로 들어서자, 조선총독부는 학병 모집을 위하여 ‘조선학도병 지원 제’를 발표하였다.

당시 총독부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지원 제’라고 주장하였다.

뒤따라 1944년 4월 1일부터 8월 20일 사이에는 제1회 징병검사가 실시되어 모두 20만 6000여명이 검사를 받았고, 합격자들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의 일제 패망 때까지 순차적으로 징집되었다.

입대 인원은 최소한 18만 4000면 이상인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이 제도를 놓고 당시 조선의 지식인 들 사이에는 여러 갈래로 의견이 갈리었다.

도망을 가버려야 한다는 분들, 학생들 장래를 위해서는 군대에 가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는 분들. 각양각색이었다.

학교마다 분위기도 달랐다.

친일에 적극적이었던 분들이 오히려 자식들을 김 건모의 '핑계'를 부르며, 지원을 시키지 않았다.

다급해진 일본은 결국 각 학교의 배속 장교를 통하여 책임동원을 명령하였다.

어쩔 때는 할당량에 쫓긴 일제의 관헌들이 직접 나섰다.

부산 부두에서 대기하다가 일본에서 귀향하는 학생들을 강제 입영시키기도 하였다.

몇몇 학도지원병 중에는 산악지대에 은신처를 마련, 동지를 규합해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장 투쟁을 준비하는 곱슬머리 정범도 같은 ‘똘 껏’도 있었으나 매우 귀했다.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하준식은 학병지원을 거부, 덕유산 은신골로 피신하여, 징용·징병 기피자 73명을 규합, 광명당을 조직해 후방 교란 게릴라 전을 기도하기도 했다.

지리산 운문산 포천군 산악 지대 금강산 등이 주요 피신처였다.

일제 당국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부의 몸짓도 있었다.

특히 보성전문으로부터 반동적 걸림돌이 불거졌다.

그러나 일제 그들도 이판사판 상황이었다.

집요하게 한명이라도 더 전쟁터로 몰기 위해, 물고 늘어졌다.

학도병 지원율·통계표를 보면 보성 전문학생은 16.O%로 연희전문의 절반 이하 이다.

반면 조국이나 윤석열이 나온 경성 법학 전문은 100.00%이다.

비교적 자유로운 연희전문의 절반 수준인 것을 보면, 인촌 김성수 교장 등 보성전문선생들이 얼마나 어영부영하면서, 총독부의 말을 깔아뭉갰는지 알 수가 있다.

인촌 김성수의 묵시적 지원을 받은 안호상, 오천석, 박극채 선생 등의 선동과 의식화 작업은 학병 지원을 최소화하였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死地로 향하는 보전 학생들의 생명도 연희전문학생들의 절반 이상을 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의식화 작업의 결과는 여러 행동의 갈래로 나타났다.

누구는 처음부터 기피해버렸고, 누구는 일제 당국에 항거했고, 누구는 학병으로 출전하여 스스로 히트 앤 런 작전을 걸어 탈출하였다.

그 탈출에는 단순한 탈출과 독립군에 투신하여 일본군을 역습하여 큰 전과를 올린 탈출도 있었다.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그 후, 일제 당국에 항거한 결과는 여러 형태다.

학생들은 고향에 돌아가서, 선무 공작을 펼쳤고, 또한 파출소 습격 등 파괴 공작을 벌였다.

함경남도 북청 지방의 학병 해당자 50여명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술을 마시고 경찰서를 때려 부수고...

또 서울에서는 재동 파출소를 때려 부수고 항거한 일이 있었다.

평양 사단의 학병 탈출 계획이나 대구 제 24부대의 학병 탈출로 나타났고, 나아가서 학병에 의한 독립항쟁이나 멀리 광복군에 편입하는 애국 정열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 들 중에는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무명의 용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일제 말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학병 세대들! 그들이 가는 길은 다 달랐다.

그들의 운명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들 중에는 김준엽, 이철승, 이병주, 황용주, 장준하, 김수환 등도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몸이 약해 구보를 못한다는 것을 잘 설명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친구’라는 판정을 받고, 귀향 조치를 받았다.

당시 학병 지원을 하지 않으면 징용으로 차출되는 것이고, 그들은 카이로 선언이 임박한 줄을 몰랐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었던 학병 김준엽(훗날 고려대 9대 총장)과 장준하의 삶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두 분은 死線을 넘어 중경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PS. 다음의 글은 가장 고려대인다운 고려대인으로 평가받는 김준엽 총장의 長征과 인촌 선생과의 사연을 쓰겠습니다.

김준엽 총장은 물봉처럼 가장 곧고 깨끗한 삶을 산분입니다.

독재 정권의 유혹에도 물 한 방울 안 묻힌 분입니다.

지성과 야성의 표상, 가장 고려대인 다운 기상을 지닌 분이지요.

인촌을 공부하고 알아 갈수록, 서 푼도 안 되는 지식과 비인간적인 개차반 사고로 인촌을 친일파로 부관참시한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의젓하고 고고한 채 폼 재고 다니는 대법관들의 만행적 판단에 치를 떱니다.

참으로 못된 인간 족속들입니다.

그들을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규탄하겠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