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꽃 삽” 1회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이 풍진 세상 1920년으로 가는 江물

▢한민족의 첫 번째 아름다운 봄 1919년 3월이 오기까지

19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해입니다.

그해는 엄동설한에도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설을 며칠 앞 둔 동지섣달, 땅이 다 얼어붙고 아이들은 코에 고드름이 맺혀 있는 때, 양력 1월 21일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사망했습니다.

1918년 가을부터 全 세계를 스폐인 독감이 휩쓸었습니다.

스페인 독감은 인류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전염병으로 당시 전 세계인구 약 16억 명 중, 감염자는 약 5억 명에 달했고, 사망자는 최소 1천 700만 명에서 최대 5천만 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사망자수 900만 명의 최소 2배에서 5배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당시 우리나라도 스폐인 독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를 살펴보면, 당시 1600만 명의 절반에 가까운 742만 명이 감염됐습니다.

이 중 약 14만 명이 사망했으니, 전체 감염자의 1.87%, 전체 인구의 0.83 %명이 스페인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고종의 죽음에는 독살설, 뇌일혈 설 등 분분하지만,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것은 고종은 이미 권력에서 밀려난 지 10년이 지난 핫바지여서 굳이 공력을 들여 거세할 만한 필요가 없어서였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찬 식혜 한 그릇을 마시고 죽었다는 데, 심장마비가 원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독감으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던 것이 간접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1918년 말부터 1919년 초반에 기승을 부려 “무오년 독감”이라고도 불렸던 스페인 독감, 당시 총독부 연감과 매일신보 등을 살펴보면 스페인 독감이 조선에 미친 영향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9월에 이미 서울에 환자가 나타났고 10월에 전국적인 유행이 절정에 달해 공사립학교와 사숙은 휴학, 각 관청과 단체에서는 사무를 보지 못했다.

11월 들어서는 개성군의 경우 다른 때의 7배의 사망률을 보였고, 충남 서산지역은 8만 명의 인구 중 6만 4천 명이 질병에 걸렸다.(조선총독부 연감)독감이 들거든 이렇게 조심하라.

앓는 이를 딴 방에 거처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곁에 가지 아니하도록 할 것이요, 환자가 쓰던 침구와 자리, 옷 같은 것은 볕을 쏘여 소독하고. 방도 자주 쓸어 靜하게 하고, 가끔 공기를 갈고, 볕을 쏘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유행 감기로 인하여 개성은 사망자가 평시의 7배나 되었다.

(매일 신보. 1918년 11월 11일)"

스페인 독감에 많은 사망자가 나왔지만, 우리 민족은 그 해 조국 독립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난 3일 토요일 오후 용인 수지에서 서울 종로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금요일 밤 기아타이거즈 야구시합을 보다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한 꿈은, 스마트 소형 원자로를 실은 원자함을 타고 북극해를 누비는 것이었습니다.

그 배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러시아의 옛 首都이고 제 딸 수의 친구 올가의 고향인 셍떼스 부르그까지 가는 배였습니다.

북극해의 얼음은 기후 온난화 영향으로 군데군데 녹아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제가 탄 배는 쇄빙선 ‘세종’이 되어 산타루치아를 부르며 망망대해, 얼음바다를 말 달리듯 달렸습니다.

최근 러시아에서 일기 시작한 갤럭시 노트 붐에 힘입어, 배에는 코리아 마크가 찍힌 스마트 전자 제품을 잔뜩 실었습니다.

다른 배도 탔습니다.

또 꿈속이기는 하지만, 이 배는 군산에서 ‘빌게이츠 프로젝트’로 추진하였던 소형 스마트원자로가 성공적으로 제작되어, 원자로를 실은 배도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그 배의 이름은 ‘이순신 원자함’이었습니다.

군산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 탄자니아 앞 바다에 부유선으로 정박한다고, 같이 배에 탑승한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번이나 지낸 적이 있는 정근모 선배님께서 설명해주었습니다.

9회 말 투아웃, 스코어는 5:2로 뒤지고 있는 불 꺼진 항구, 내가 사랑하는 군산, 경제가 수렁에 빠진 내 딸 군산이 절대 절명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역전 결승타는 浮游式 원자력 함 제조였던 것입니다.

너무나 흥분되어 ‘군산 만세’ 소리를 지르다가, 트로트 가수 노래를 TV에서 밤늦게 까지 보다가 잠이 설 든 마누라에게 ‘딴 방에 가서 자라!’고 얻어 들었습니다.

방에서 쫓겨나, 달은 휘어 청 늦은 밤과 여명의 시간 사이, 소나무 곁에 서서 담배 한 대를 피고 있는 데, 인촌 김성수 선생께서 웃고 계셨습니다.

자네가 “내 동생 秀堂 김연수와 자내 당숙 신 건희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해서 나와 봤네. 나보다 5살 밑 동생들이네.” 하시며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다 날이 새서 10월 3일 개천절이 되었습니다.

진한 꿈의 여파는 저를 이 아름다운 가을 날 오후 ‘추억으로 가는 열차 지하철’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종로 행 지하철을 타면서부터 回想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교시절 하도 야구보기와 연애편지 쓰기에만 골몰하고 공부를 안 해 대학시험에 낙방을 했습니다.

수업시간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만 있으면 서울대 입학은 ‘따 논 당상’이라는 종로학원 서울대 엘리뜨 특수반에서 재수를 하였습니다.

(황교안 대표는 종로학원 제 일 년 후배입니다.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였지만 성적이 월등하게 좋지는 않아 종로학원 서울대 보통반을 다녔습니다. 공부는 잘하였지만 시험장에만 가면 떠는지 서울대에 충분히 합격할 실력을 가졌으면서도 두 번이나 떨어졌습니다.)

종로학원 재수 시절을 생각하니 , 정 경진 원장님과 바둑을 두다 원장님 배를 돋우던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경기고 수학교사 출신인 정 원장님은 바둑에 깊이 빠져있었습니다. 이낙연 대표의 고향인 영광 법성포 옆 마을이 고향일 것입니다.

어떻게나 승부욕이 강한지, 바둑에 연거푸 지자 돌을 거두며, “재수생이 공부는 안하고 맨 날 바둑만 두느냐?”고 화를 벼락같이 내시더군요.

훗날 신문 가십 란에 내기 바둑으로 사기를 당하여 학원의 절반을 날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 때 ‘좀 더 강하게 키울 걸’ 하는 후회가 들더군요.

정 원장님은 고무래 丁자, 압해 정씨로 정약용 다산의 후손인데, ‘수학의 완성’이라는 책이 수학입시 참고서로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학원을 차린 분입니다.

몇 년 뒤에야, 지금 상산고 이사장님이신 홍성대 선생님께서 ‘수학의 정석’을 내서 수학 참고서 제왕의 자리를 탈환하였습니다.

그 때 책이 팔려 번 돈으로 어떻게든 과학의 기초인 수학의 영재를 길러내야겠다고 설립한 학교가 전주 상산고입니다.

우리나라 입시 열풍에 밀려 홍 이사장님의 꿈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홍 이사장님은 인재 양성의 아쉬운 미련을 진돗개와 태권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달래고 있더군요.

영어대학입시 참고서도 빨간 책 표지의 ‘알기 쉬운 삼위일체’(‘알 삼’으로 불림), 정통종합영어, 영어의 왕도 등이 있었는데, 일본의 참고서들을 많이 베낀 책들입니다.

저는 늘 어머니에게 용돈을 타는 명분으로 이 책들을 들먹였는데, 하도 여러 번 이용했더니 제 어머님은 ‘영어에도 왕도 있고 신하도 있다 냐?’ 하고 물으시더군요.

이런 저런 연유로 저는 광화문 연가의 무대인 정동 교회가 있는 대성학원 옆 길 보다는 종로의 가회동, 계동, 팔판동의 흙냄새 나는 그 옛 길을 좋아합니다.

풍문여고나 덕성여고 앞 분식집에 가면 지금처럼 빨간 떡볶이가 아닌 조선장으로 간을 맞추고 후추를 약간 넣은 갈색 추억의 궁중 떡볶이를 팔아, 제 학원 비는 늘 비가 새는 문간 채 신세였습니다.

저는 1975년의 재수시절 45년 전의 그 날들과 1919년 스페인 독감 와중에도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만들고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외쳤던 100년 전 그 분들의 여정을 생각하며 옛 서울의 한 복판 종로거리를 걸었습니다.

▢중앙학교 숙직실은 독립운동의 産室

하나씩 낱개로 파는 까치담배도 생각하며 담배도 피어보고, 천원에 한 개씩 파는 호떡도 사먹고 걷다가, 일본 고교야구의 괴물 에가와를 상대로 홈런을 때린 유대성이 야구 선수로 뛴 중앙고등학교를 먼저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서 3·1운동이 발아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초 중앙고등학교숙직실은 새로 지은 교사 앞 운동장의 동남 편에 있습니다. 조그만 기와집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곳에 옮겨서 옛날의 숙직실을 복원했고 원래 숙직실 자리에는 ‘3·1 운동 책원지’라는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 숙직실은 일제 초기 가장 우수하였던 민족의 수재들이 드나들었던 아지트였을 뿐만 아니라 후에는 3·1운동의 모의장소가 되기도 했고, 仁村과 古下의 살림집이기도 했습니다.

인촌은 중앙고등학교를 경영하게 되었으면서도 서울에 가정을 꾸밀만한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벌써 고향에는 남매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맏아들 상만은 여덟 살이었고, 맏딸 상옥은 두 살이었습니다.

둘째 아들 상기는 그 이듬해 1918년 태어났습니다.

지금 인촌의 고택으로 알려진, 대동 상고로 가는 골목길의 계동 130번지 집은 서울에 와서 김 사용으로부터 산 집이었습니다.

학교의 사택이자 숙직실에 고하와 현상윤이 들어 거주하게 되었고 인촌도 아예 그들과 함께 잠을 자고 식사는 김사용의 집에서 날라다 먹게 되었습니다.

기당 현상윤(1893∼1950년 납북)은 평북 정주출신으로 평양의 대성학교를 다니다가 ‘105인 사건’으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서울로 올라와 보성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사학과를 1916년에 졸업했습니다.

동경 유학 중에는 유학생들의 잡지인 ‘學之光’ 의 편집 주간 일도 보았는데 인촌의 부름으로 중앙학교 교사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인촌이 28세, 고하가 29세, 현상윤이 26세였습니다.

동경제대에 재학 중이던 인촌의 친구 김우영은 당시의 중앙학교 숙직실 풍경을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여름 방학에 귀국하면 서울 중앙학교 숙직실은 우리 동지들의 集會處였다. 인촌은 아직 서울에 이사도 아니 하고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기거했다. 그 때 고하도 인촌과 함께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역시 기개만장으로 세계정세를 통론하며 日美戰爭을 예언하며 불원한 장래에 우리 독립은 필연적으로 도래하리라고 주장하면 인촌은 묵묵히 경청하다가 때로 미소지으며, 그러니 우리 민족의 능력을 양성하여 好機를 잃지 안해야 된다는 것이었다.”(김우영, 내가 아는 인촌 <新生公論>,1955.6)

1918년 11월, 5년간에 걸친 세계 제 1차 대전은 독일의 항복으로 끝장을 보게 되었고, 마침 6월에는 「베르사이유」강화회담이 열려 미국 대통령 「윌슨」의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습니다.

이는 즉각 해외 독립운동자들의 투쟁의식을 고취하는 결과가 되었고, 국권을 상실 당한 후 십여 년간 일제의 武斷 치하에서 시달리던 국내 각계의 지도자들에게도 독립운동에 대한 기운이 무르익어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18년 12월 어느 날 「워싱턴」에서 재미 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던 雩南 이승만이 밀사를 보내왔습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

다음 글도 지금부터 100년 전, 1920년으로 가는 열차의 큰 역인 「3·1 운동역」의 의미와 상황 그리고 풍경을 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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