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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제가 소설 『꽃 삽』을 쓰는 이유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할 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데 매우 인색하고 서투른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많은 이들이 사람마저도 자기가 구축한 인식의 틀, 프레임으로만 봅니다.

어느 한 개인이 의사나 행동을 결정할 때는 자기만의 고유한 속사정이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의 속내는 고사하고 입장을 헤아려보는 미덕이 발휘되는 경우가 별로 없는 듯합니다.

저는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할 때는 적어도 자기하면 어떠했을까하는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봐’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봅니다.

인촌 김성수 선생 공부를 좀 한 다음에, 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처럼 모든 사람이 자기만 똑똑하고 옳다고 믿는 풍토 속에서, ‘인촌 김성수 선생 정신’의 부활이야말로 난마처럼 얽히고 꼬인 한국사회의 질곡과 모순을 풀어내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소신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양보와 타협’ ‘선공후사’ ‘공명정대’ ‘신의일관’ ‘담박명지’ ‘사랑과 인의와 관용’의 삶을 글자 그대로 수행하고 평생을 마친 분입니다.

인촌의 동생 ‘秀堂 김연수(金䄵洙) 선생’은 우리나라의 가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기업다운 기업을 최초로 세운 경제인입니다.

제가 두 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놀라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많은 분들이 한국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두 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 분의 이름이 나오기만 하면 빛의 속도로 ‘친일파’로 치환되는 이미지 연상 작용이 놀랍습니다.

셋째는 두 분이 진짜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친일행위를 한 것일까 아니면 친일로 오해받을 수 있는 행위를 한 것일까? 두 분의 그런 행위의 배경과 사연은 도대체 무엇 일까?에 대한 의문부호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분에게 친일 주홍 글씨 명찰을 달아준 결정적 친일행위 증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보성전문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통해 학병을 권유하는 방송, 연설, 新聞 ·잡지 등의 기고문입니다.

그 행위가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애매합니다만, 총독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지식인 누구나 고뇌하지 않을 수 없는 회색빛 시절이었습니다.

1941년 발발한 태평양 전쟁은 일본이 불리해지자 그들은 옥쇄를 각오하고 덤볐습니다.

항공모함과 전투기, 전함과 잠수함, 대포와 전차를 자체 제작하여 귀축미영(鬼畜米英)과 전쟁을 벌이는 나라가 일본이었습니다.

저처럼 돈 키호테가 아니고 시대의 현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기백 명 규모의 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 의열단, 독립군이 항일무장투쟁을 벌여 막강 일본을 제압하고 해방을 쟁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미당 서정주는 기회주의적이고 문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의 지배가 오래갈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이 무렵의 그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나는 그 가까운 1945년 8월의 그들의 패망은 / 상상도 못했고 / 다만 그들의 100년 200년의 장기 지배만이/ 우리가 오래 두고 당할 운명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다른 한 편의 조선의 지식인들은 점점 암울해져가는 정세에 절망낙담하고 깊은 고뇌 끝에 궤도를 수정합니다.

즉, 납세와 병역의무를 이행하는 대가로 참정권을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심각한 병력 부족현상에 직면하자 식민지 청년들에 대한 징병제 시행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일본이 주로 썼던 수법은 ‘기브 앤 테이크’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이 깨우친 것이 ‘공짜 점심은 없다.’입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 청년을 전쟁터로 끌어내려면 조선 사람들에게 참정권 (제국의회의 의원선출)을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조선인에게 제국의회 의석을 주는 조건으로 “일본을 위해 싸워 달라”는 거래가 성사된 것입니다.

1943년 11월 교토에서 이광수의 학병 권유를 직접 들었던 인물이 김우전 전 광복회 회장입니다.

이광수의 연설은 “당신들이 희생해야 우리 민족이 차별을 안고 편하게 살 수 있다. 조선민족을 위해 전쟁에 나가라”는 내용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제가 읽어본 1943년 인촌 김성수의 보성 전문학교 학병 壯行式에서 한 연설내용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인촌은 “부모 형제 가족분 들은 우리가 잘 보살필 테니 제군들은 꼭 살아서만 돌아오라!” 고 눈물겨운 호소를 합니다.

인촌도 총독부의 학병 징집독려에 처음에는 완강하게 협조를 거부했습니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지, 생명을 보장하지도 못하면서 군인으로 싸우게 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일본의 압박이 거세지기도 하였지만, 거부할 수도 없는 대세 속에서 학생과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실익도 많이 따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몇몇 분들은 조선이 앞으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신식 군대의 군사훈련을 배워 와야 된다고도 생각했고, 징병에 협력하면 조선인에게 배정되도록 한 귀족원 상원 7인(대만인 3인), 중의원 23인(대만인 5인)도 나라의 앞날 개척에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일본의 한국 병합은 당시의 열강들의 세력 확장 국제질서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905년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비밀협정 카쓰라 테프트 밀약으로 필리핀은 미국에게 조선은 일본에게 바쳐지기로 갈 길이 정해져 버린 것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천하의 매국노로 지탄받는 이완용이 을사조약 문서에 먼저 사인한 것도 아닙니다.

고종이 이미 먼저 사인을 해놓고도, 나는 안 했다고 비밀로 해달라고 일본에 부탁을 하여 책임을 면하는 모양새를 갖추어놓고 이완용 등 대신을 방패 막 을사오적으로 연출해놓은 것입니다.

고종, 임금이란 작자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만 보고 있다가, 이제는 해는 기울었으니 일본 당신들이 알아서 우리 조선의 살점을 뜯어먹으라고 해놓고, 자신은 마포바지 방귀 빠져나가듯 면류관을 신하들에게 씌워놓은 것입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보편화 될 정도로 역사의 죄인이 된 을사오적마저도 찬찬히 뜯어보면 할 말이 서 말은 될 것입니다.

제가 이 글로 많은 사람들의 사연을 기록해두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친일 반일의 프레임은 그 내막을 살펴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945년 9월 10일 평양 주둔 소련군정 사령부는 38선 이북의 각 지역 위수 사령부에 ‘독립조선의 인민정부 수립요강’ 6개항을 지령합니다.

그 중 네번째 항목이 “친일분자는 철저히 소탕하고 각 분야의 불순분자를 엄정하게 숙청”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공산정권 창출에 협조하는 자들은 일제하에서 무슨 짓을 했든 관계없이 우군으로 수용하여 요직을 맡깁니다.

반대로 공산정권 창출에 저항하는 자들은 “친일파, 민족 반역자” 낙인을 찍어 철저히 소탕·제거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소련공산당의 “친일 청산을 통한 공산정권 창출” 계획은 서울 주재 소련 영사관을 통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후에 남로당)에게도 지령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1945년 10월 단신으로 환국한 이승만은 귀국 일성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로 표출된 ‘대동단결, 자주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서울 주재 소련영사관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조선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은 즉각 이승만 노선에 반기를 듭니다.

10월 30일, 박헌영은 “통일에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덮어놓고 한데 뭉칠 수는 없다. 조선에는 아직도 일제의 잔재세력이 남아있다.

친일파를 근절시킨 다음 옥석을 완전하게 가려놓고 순전한 애국자,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만을 한데 뭉쳐 통일해야 한다.” 하면서 이승만의 대동단결 노선을 정면에서 맞받아쳤습니다.

친일파 척결은 민족 정기회복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정치공학 정략적 차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민족정기를 생명처럼 여기는 북한이 정부를 구성할 때, 친일 인사들을 요직에 두루 기용하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친일의 기준이나, 친일파를 처단하자는 목소리가 정권의 색깔에 따라 늘 변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차차 논의하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반일 카드’만큼 확실한 정치적 승부처는 없습니다. 만병통치약입니다.

우리나라 분들은 70% 정도가 일본사람들이라면 꼴도 보기 싫습니다. 그냥 싫습니다. 축구도 야구도 배구도 절대 져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우리의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의 반일 선동에 격하게 반응하여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웁니다.

중국은 떼국놈이라 하면서도 굽신굽신하고 일본은 논만 사도 배가 아픕니다.

반일, 반응이 뜨거우니 정치인들은 계속 그 약을 사용합니다.

그러는 사이, 점점 한국은 이성은 마비되고 감정만 살아남습니다. 거의 모든 역량과 에너지는 미래를 향한 준비가 아니라 과거사를 개운하게 때려 엎는 데 투입됩니다.

이 중세적 狂氣는 좌나 우나 가릴 것이 없습니다.

■ 『꽃 삽』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제 이야기는 오늘부터 100년 前 1920년 10월 6일, 교토시(京都), 사교區에서 만났던 세 사람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날은 샛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步道위에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날이었습니다.

교토시는 일본의 서쪽에 위치한 도시로서 교토부의 부청 소재지입니다.

일본 간사이(關西)지방인 이곳은 일본 남단의 규슈(九州)와 함께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은 곳입니다.

교토분지는 주로 한반도 및 대륙에서 건너온 귀화인에 의해 일찍이 개발됨에 따라 토지의 開拓·灌漑에 의한 농업생산과 양잠·견직 등의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794년 이 곳 교토에 새 도읍 헤이안경(平安京)을 造營(집을 지음)하고 천도하였습니다. 그 후 400년간에 걸친 헤이안시대에 국정의 중심지로 번영하였으나, 바쿠후(幕府)정치의 시작과 더불어 정치적 기능을 상실하였고, 에도시대(江戶시대: 1603∼1867)에는 정치의 중심이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겨짐에 따라 형식상의 수도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더불어, 도쿄로 천도할 때 인구 50만의 대도시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경제·문화의 중심지이자 국제적인 관광도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교토시민의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자신들이 일본의 정신적인 수도, 문화의 수도라는 자긍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교토시를 학술·문화도시로 인정하여줍니다.

그 배경에는 교토대학·도시샤(同志社大學)외에 많은 대학과 박물관·미술관·국제회관 등 문화시설이 있습니다.

제가 1999년 광주를 아시아의 대표적인 문화도시로 만들겠다고 천명을 하고는 교토시를 산업스파이처럼 3번을 잠입하였습니다.

자비를 들여 비행기 표를 끊고, 교토시 구석구석 골목골목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오뎅 집에 들어가 정종 대포를 한두 잔 시켜놓고, 여러 생각에 잠겼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가을이니까요, 또 테스형을 외치는 훈아 형의 목소리 여운이 귓전에서 떠나질 않으니까요.

그러다 이번 가을 제 상상의 날개를 타고 시간을 거슬러, 지리적 공간을 넘어 교토시로 날아갔습니다.

그 곳에서 세 분을 만났습니다.

제 이야기는 소설 형식을 띠지만 기본 구조는 논픽션입니다.

문헌이나 자료를 인용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口傳 등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중시합니다.

있었던 사실에 충실합니다만, 독자들의 이해와 흥미를 북돋우기 위해 약간의 양념을 치기도 합니다.

사실과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저의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뼈대가 떠나 간 인물들의 사연이기에, 저나 그분과 비슷한 분이 빙의되어 등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100년 前이라는 시간 그리고 數 萬里 멀리 떨어져 산 분 들과의 시간과 공간 거리에서 오는 한계라는 점을 이해하여주기 바랍니다.

■1920년 시월, 교토제국대학 앞 하숙집 촌에서 만난 세 사람: 김연수(김성수의 동생), 윤영석(윤동주의 부친), 신건희( 물봉의 당숙)

쌀쌀해지는 날씨, 독자 여러분 모두 건안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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