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인촌 김 성수 선생에게만 돌을 던지는가?”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지난 토요일 과천에 있는 서울 대공원을 찾았다.

과천 대공원에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주춧돌 인물인 신채호, 조명하, 조병옥, 그리고 김성수의 동상이 공원 안 쪽에 있다.

1991년 고건 서울시장 시절 세워졌나보다.

다른 분들의 동상은 잘 관리되어 있으나, 인촌의 동상만 잡초가 무성해 있고, 동상 입구에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안내문>

김성수는 일제강점기에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고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세웠으며 1920년 동아일보사를 창간하였고 해방이후 미군정청 고문회의 의장, 제2대 부통령을 지냄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91년 11월 11일 동상이 건립되었지만, 2017년 4월 대법원에서 친일 반민족행위가 인정되어 2018년 4월 2월 국무회의 의결로 건국 훈장의 서훈이 취소됨(현재 동상의 이전·철거 등의 절차를 진행 중에 있음)

가을이 깊어 감을 알리는 비는 촉촉이 내리고, 인촌은 비를 맞고 있었다.

인촌의 생전에도 ‘친일’ 문제가 안 나왔던 것은 아니다.

인촌은 그야말로 채근담에 나오는 ‘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삶을 살아왔던 분이다.

남을 대할 대는 봄바람같이 부드러웠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했다.

호만 물봉으로 쓰지 자기 먹을 것은 우선 챙기고 남 속 쓰라린 것은 당최 모르는, '待人秋霜 持己春風’ 의 나 같은 者하고는 천양지차의 삶을 살았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물결이 드높아진 가운데, 친일파를 정치권력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공산주의자들에게서 나왔다.

“선생님, 누가 친일파라고 하면 속상하지요?”

이 말에 인촌은 그다지 화를 내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본심은 알려지게 되어 있어요. 나를 위해서 일본과 타협하고 고개 숙인적은 없어요.

이 나라와 민족이 잘 되기만을 바라고 한 행동이니 누가 뭐라고 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인촌만큼 세상 사람들부터 두루두루 존경을 받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몽양 여 운형과는 사상적으로는 대립했으나, 사적으로는 친분이 두터웠다.

인촌은 꼭 그의 호 인촌 그대로 산분이다.

자주 내가 머무르는 이곳에서 가까운 인촌이 어린 시절을 보낸 부안면 인촌리 인촌강가를 거닐어본다.

유유히 흐르는 강처럼 산분이다.

안재홍같이 비타협적 자세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본인은 민주 민권 민생의 강한 이념을 갖고 있으면서도, 좌우 편향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강물이 흐르며 강가의 풀이나 곡식들을 먹여 살리듯이, 많은 분들의 氣를 펴주고 도와주려고 애썼다.

여운형의 평생 친구인 조동호를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시켜 대우를 잘해주었고,

친일로 몰려 내동댕이쳐진 춘원 이광수에게 글을 쓸 수 있게 하고, 보약을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의 제일 큰 손도 인촌이었다.

창을 하는 소리꾼들의 빈한함에 늘 가슴아파했고, 재주가 있으나 가난해 공부를 못한 이들의 장학금도 늘 인촌의 몫이었다.

인촌이 미워한 사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친자식만큼이나 애지중지하였던 영어를 잘 한 이인수를 6.25 전쟁 기간 써먹고 버린 신 성모 국방장관,

그리고 자신과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가 정치깡패집단 친일 각파유지연맹을 비난했다고, 요정인 ‘식도원’으로 유인하여 권총으로 협박과 구타를 가했던 박춘금 정도였다.( 그 충격으로 송진우와 김성수는 사장직과 이사직을 그만 두었으니, 신문사를 경영해봤자 힘도 없고 일제로부터 얼마나 심한 회유와 압제를 받았는지 알 수가 있다.)

그렇게 강 같은 평화, 인촌도 한번 결단하면 무서웠다.

초대 농림부장관이었던 조봉암이 농지개혁법을 입안하고 대지주에게 경제적인 토대를 완전히 몰수하려하자,

당시의 지주들은 농지개혁에 결사적으로 저항하려하였지만,

호남의 최대지주이며 한민당의 실질적 대표였던 인촌이 농지개혁을 하자고 하니까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위라며 이승만 정권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29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그의 밑에서는 아무도 가진 바 역량과 포부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략)

원컨대 앞으로 우리 국가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는 일개 평민의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전제 군주적 독재정치화의 위협을 제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전 자유세계의 동정과 원조를 획득하여 항구적인 자유와 평화의 복락을,

이 나라 이 겨레에 가져오도록 하기 위하여 국민 대중과 함께 결사분투할 것을 맹세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의 정통 보수, 자유민주주의자로서 인촌에게 지워진 멍에

인촌의 가슴에는 인간에 대한 배려, 관용과 포용,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 등의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녹아있다. 천성적으로 타고 난 분이다.

본인은 구두 뒷 굽이 다 닳도록 새 구두를 사 신지 않고 그 돈을 아껴 장학금으로 내 놓았다.

이 아주 여사가 부산 피난 시절 새 대나무 자리를 비싸게 사왔다고 꾸짖고, 피난 온 중앙고보 교사들의 월급을 챙기려 뛰어다녔다.

인촌은 ‘인자무적’의 사표와 같은 분이다.

그런 인촌에게도 인촌을 못 잡아먹어서 환장한 분들이 생겼다.

처음에는 주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인촌이 지주집안출신에다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천성적으로 싫어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치권력을 쥐려하며 할수록,인촌은 거세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었다.

명분을 만들어야 했다.

인촌을 친일 반동 분자로 몰기 시작한 것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 등에는 주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포진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인촌 김성수의 삶을 샅샅이 아는 분들이 많았다.

인촌에 대해 친일 말을 꺼냈던 자들이 비난에 휩싸였고, 북한으로 많이 가버렸고, 시지 부지되었다.

50여년 가까이 인촌에 대한 친일시비는 언급되지도 않았다.

인촌을 싫어하고 시비를 붙는 사람은 좌익 사상을 가진 분들이거나 그들에게 세뇌된 분들 밖에는 없다.

그러다가 좌파 색깔이 강한 분들이 정권을 잡았다.

더불어 진보라기 보다는 좌파적 이념을 추구하는 역사 연구단체인 민족문화연구소 등의 발언권이 세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반봉건· 반자본·반제국의 이념을 그대로 간직한 제3세계 종속론의 입장을 강하게 갖고 있는 단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100년 전에 풍미하였던 반제국주의적 역사관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단체다.

물봉의 친 당숙인 교토제국대학 출신 신건희 전 김일성 대학 부총장( 625 동란시절 양정고교 교장을 지내고 있다가,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자들에 의해 월북) 이 수립한

‘김일성 유일사상’과, 거의 흡사한 사상체계를 갖는 분들의 모임 체다.

김일성 유일사상의 핵심기저가 ‘사람이 먼저다’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사상전쟁으로 꺼낸 카드가 인촌 등에 대하여 매판의 굴레를 씌우고 민족을 팔아먹은 자라는 친일파의 멍에를 씌워 부관 참시하는 것이었다.

인촌은 정치꾼 역사학자들의 선동과 정권의 비호아래 처절하게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인촌과 좌익은 생래적으로 맞지 않았다.

그는 좌익사상이 ‘인간과 공동체의 행복을 담보해주지 못하고 개인의 권력 욕구를 채우는 마취제 같은 것이다.’고 믿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일찍이 청년 일본 유학시절 당시 밀물처럼 밀어닥친 사회주의 사상을 보고 허위의식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인촌은 거의 완성형 인간이다.

자신은 하나도 갖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었다.

거의 모든 이들을 껴안아 주었다.

인도에 간디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인촌이었다.

정치적인 좋은 자리도 남에게 다 양보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늘 찾고 다녔고, 그 사람을 전심전력으로 도왔다.

그 시절 남자들이 아무런 거리 낌 없이 행하던 여인을 함부로 대하는 일도 절대 하지 않았다.

사별한 담양 고 씨 첫 부인을 평생 그리워하고, 나중에 만난 고교생 독립운동가 이아주 여사를 존경하고 살았다.

다음 글도 무슨 꿍꿍이속으로 인해, 인촌에 대한 친일파 부관참시가 이루어졌는지 그 내막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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