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1. 걱정 그 알 수 없는 삶의 미로여!

前 편의 글을 읽은 몇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신의 글은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이여, 진짜 걱정을 더 하라는 것이여?”

제법 내 글을 진중하게 읽었는지 걱정이 돼서 죽겠단다.

공직자 경험에서 볼 때, 한국 사회의 큰 문제점을 “진 짜 걱정 할 것은 안 해 불고, 걱정 안 해도 될 것은 다 찾아서 걱정해부는 것”으로 본다.

자식 욕심이 많은 어머니는 걱정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피곤에 지쳐 곤하게 잠에 떨어져야 걱정을 멈췄다.

아들이 없는 큰 아들, 돈만 쓰고 다니는 실속 없는 작은 아들, 돈을 못 버는 사위에게 시집 가 평생 고생만 하는 딸, 몸이 약한 며느리, 걱정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나는 어머님의 걱정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어머니는 걱정을 하기 위해 사는 분 같았다.

몸은 갈수록 여위어가고 혈압은 높아만 가도, 자식들 걱정은 그칠 줄을 몰랐다.

며느리들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고추장을 담그느라고 땀으로 목욕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과욕이다 싶었다.

걱정은 참말로 팔자였다.

“자그마니 일 잔 하시시오.” 부탁하고 애원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는 돈을 너무나 아끼는 것도 나에게는 불만이었다.

돈이 아까워서 좋아하는 영화는커녕 짜장면 한 그릇도 못 사먹었다. 그러면서 손주들 책 사주라고 용돈을 꼬깃꼬깃 모은 돈을 내 놓으셨다.

그러고도 건강하게 사시다 떠나셨으면, 부모님 속을 많이 썩힌 이 불효자식에게 죄책감은 많이 남기지 않고 가셨으리라.

여든이 넘자마자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누워, 햇볕에 몸을 의탁한 고구마처럼 마르신채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밉디 미운 대장암의 원인 제공자가 나인 것처럼 여겨져 참으로 괴로웠다.

그 때 나의 한은 딱 하나였다.

“병귀 엄마처럼 집안 청소 도 좀 안하고, 며느리하고 큰 소리로 싸움도 좀 하고 사셨으면 안 되었을까?”

무슨 근심이 그리도 많아, 평생을 자식들 걱정만 하다가 이토록 힘든 병을 가졌을까?

동백꽃이 뚝뚝 떨어지던 봄 날, 어머님은 가셨다.

어머님을 묻고 와서, 나는 결심을 하였다.

나부터 걱정을 않고 살리라. 더 나아가 ‘걱정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좀 기여를 해보리라.

나의 걱정을 않고 살리라는 각오는 꽤 깊은 시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온 말이다.

나는 사람을 관찰하고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누가 과연 일을 하는가? 는 나의 집요한 관찰 대상이었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일의 성과가 딱 지표나 숫자 등으로 잘 안 나타나다보니 모두 다 자기가 일을 최고로 제일 잘 한다고 우긴다.

말을 잘 듣는 자를 일을 잘 한다고 하기도 하고 술을 잘 사 주는 자를 일을 잘하고 전도양양한 사람이라고 싹수가 있다고 하기도 한다.

나처럼 시장한테 이것은 이래서 틀렸고 저것은 이런 점을 고쳐야 한다고 대드는 놈은 사무관에서 시작해서 서기관으로 안 끝난 것이 다행인 줄 모른다.

보통 때에는 썩은 동태눈을 하고 있던 자들도 승진 철만 되면 눈이 번쩍번쩍 살아난다.

그렇다고 광주시청에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맑은 심성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따르려고 애썼다.

또 반면에 사방팔방에서 나의 하는 일에 진정한 관심을 가져주기 보다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도 많았다.

입을 놔두고 죽은 귀신은 없었다.

다 한 마디 씩 하고,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고 뿌뜻해 했다.

요즘 공무원들은 상사의 말이라고 곧이 곧 대로 듣지 않는다.

탓할 바도 아니다. 문제는 그리 고민하지도 않고 무조건 자신의 고정관념으로만 나에게 대드는 일이다.

겨우 한다는 말이 ‘지금까지 이렇게 해본 적이 없다.’는 것, ‘법규나 규정에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 이다.

나는 묻는다. “왜 이 일을 하려 하는지 생각해봤어? 이 일을 해서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려고 마음 한 번 먹어봤어?”

그들은 일을 공식에 대입해서 답을 내면 편했고, 기준에 따르면 걱정할 것 없이 안심이 되었고 속이 편안해졌다.

나는 달랐다.

하나님과 공동으로 세상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창조적 사역과정으로 일을 해야 했다.

나는 밤이 새도록 연구해서 지시를 하면 그들은 순식간에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판단을 내리고 나의 지시를 거부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익숙하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는 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기로 했다.

단독 기안도 많았다.

공무원이 평가가 좋고 실력도 좋고 유능하다는 것은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걱정을 많이 한다.'와 상통한다.

공무원들은 세월의 짬밥을 통해 잘 안다.

괜히 일한다고 나서기 보다는 그저 적절히 시키는 일이나 하고 인간관계나 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신상에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한국 행정의 가장 큰 병폐 1번은 보신주의다.

2. 한국의 공직사회는 ‘걱정’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정작 하여야 할 국민에 대한 걱정은 별로 없다.

한국 행정은 공격수는 없다. 다 수비의 천재 들이다.

닥친 문제만 해결하기도 벅차다.

그런 판에, 누가 미래를 내다보고 회사를 살리는 히트 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애쓰느냐는 말이다.

신세가 딱하기는 하다.

동네북이 공무원이다. 의회 의원들에게 불려 다니고, 기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다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막 비판부터 쓰고 본다.

언론이란게 묘해서 일단 두들겨 맞으면 비 맞은 새된다.

보도자료 내고 해명하느라 날 밤을 새운다.

시민사회단체들은 행정을 하는 이들을 바보로 몰아놔야 끝 발이 선다.

그래서 나는 ‘긴 것은 기고 아닌 것은 아니다.’고 외치기로 했다. 투쟁하기로 했다.

수많은 오해, 숨이 막혀버릴 것 같은 장막 속에서도 누르면 누를수록 용수철처럼 튀어나간 이유다.

변명 같지만, ‘너처럼 모난 놈은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나는 용감한 소년처럼 세상만사에 걱정이 없었고, 이 한 몸 꺾여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을 뿐이었다.

이런 나를 견제하기 위해 아내가 직장 생활을 일찍 그만 두어 버린 것이 나를 힘들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상사였다.

그들은 걱정의 황제였고 챔피언이었다.

걱정의 여제인 울 엄니보다 더 많이 걱정했다.

내가 과장 시절 걱정을 하느라 한 숨도 못 잔 국장은, 아침부터 시장과 같이 차를 타고 가다 시장이 물어볼 것들을 걱정했다.

부하직원들은 가상 추리 모범 답안을 만드느라 그 비싼 종이 에다 잉크를 많이도 썼다.

중요 질의 예상 문제에는 형광펜으로 줄을 치고 별 세 개 까지 붙여 넣었다.

그 전 날 누군가와 술을 코가 삐뚤어지게 먹은 시장은 차에 타자마자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았다.

나의 하는 일마다 걱정을 했다.

구라가 좋은 ‘백기완 선생’을 초청해 민족 예술의 혼에 대해 강의를 부탁했다.

‘그런 일은 당신이 책임지고 알아서 하라!’고 했던 국장이 어디서 백기완 말은 들었는지,

“세상에, 세상에 반체제 인사 백기완이 우리 광주시청에 와서 공무원과 시민을 상대로 강의를 하면 어떻게 되겠소?, 신 과장님 신과장님 나 좀 봐주시오. 내가 이틀 밤을 한 숨도 못 잤소.”

아닌게 아니라 그런 일 없어도 걱정하느라고 날밤을 지새우는 국장님의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국장님 국장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백기완 선생 무슨 황해도에서 호랑이하고 한 판 붙었다는 이야기 다 구라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빨 빠진 개가 되어가자고 어디 물 힘도 없습니다. 민주화가 다 된 마당에 그런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아무리 좋은 강사 모셔 와도 공무원들은 강의만 시작되면 예비군 훈련 나온 것처럼 잠을 자 버린 깨,

장성 아카데미 잡으려면 제가 이빨 센 사람들로 몇 번은 가야겠습니다.

황구라 황석영, 남도 뱃노래 김지하 구라, 방 동규 구라를 연속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전 번에 서울대 규장각 관장 정옥자 교수님 영·정조 선비사상 강의 때 하필 맨 앞줄에 앉은 분들이 코를 어떻게나 세게 고는 지, 제가 민망해서 혼났습니다.

김제동이나 유재석이 같은 개그맨을 데리고 와야 할지, 고민이 많습니다. "

“안 되오, 안 돼. 백기완 선생 오면 경찰 안기부에서 다 나오고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요. 한 번만 내 사정 봐주시오.

내가 걱정 때문에 한 숨도 잘 수가 없소."

"국장님, 아니란 말입니다. 인자 백기완 선생은 불꽃이 아닙니다. 이빨이 다 빠져버렸어요.

그 분이 민족문화의 원형질에 대한 혜안이 있고 강의를 재미있게 해서 초청 한 것뿐입니다."

"안 돼요, 안 돼. 큰 일 나부요. 무슨 말을 해 불지 모르요. 어디 카톨릭센터 그런 데 가서 하시오!"

아무리 설득해도 안됐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백기완 선생의 돈암동 조그만 한 옥집을 지키는 최 여사가 전화를 받았다.

“예정 된 강의 일정을 좀 연기하여야겠습니다.”

“ 무슨 사유인지 정확히 말씀해주십시오. 보고를 드려봐야겠지만, 이 일 간단히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내일 서울 올라가서 찾아뵙고,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은행잎이 수북이 쌓인 늦가을 거리를 돌아다니다 사무실에 귀환하니, 여러 통의 전화가 메모되어 있었다.

기자실에 있던 한겨레 안 관옥 기자가 사무실에 올라 왔다.

한국일보 김 기자에게서도 급한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백기완 선생이 “끝나지 않은 탄압, 나의 입에 재갈을 그만 물려라! 나의 사랑 민주도시 광주여, 너마저도!”라는 제하의 기자회견이 있었다고 한다.

본사 문화부장으로부터 특별 취재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다음 날 새벽밥도 안 먹고, 아껴놓은 감로차를 챙겨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선생님 광주에서 저 신 광조 왔습니다.”

삐꺽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 세 번이나 큰 소리로 우렁차게 말해도 아무 응답이 없었다.

방문을 열어 제 꼈다. 대문짝만한 한지를 널어놓고 먹을 갈아 붓으로 글씨를 쓰고 계셨다.

"바쁜 데 뭣 하러 왔소.

내가 모레 조간 한 겨레 신문 1면 하단 전체에 낼 성명서를 쓰고 있소, 어떤 놈이 그랬는지 말하고 가시오.

백 완담이에게 물어봤더니 당신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하 더 구만. 김대중이가 그랬어, 당신 시장이 그랬어.

왜, 이 불쌍하고 힘없는 백기완이의 입과 손을 묶느냐고."

"선생님 그게 아닙니다."

"아니기는 뭣이 아니어.

YS! 요놈의 자식, 자기와 옷깃이라도 스친 사람들은 다 청와대 불러 칼국수 먹이면서 나는 한 번 부르지도 않아.

DJ! 이 양반은 의리라고는 병아리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여.

내가 민주화 투쟁 때 옛 정을 생각해서 지난 대선 때, DJ 대통령 지지하고 사퇴도 해줬지 않소.

대통령 당선되고 전화 한 통화도 없는 사람이여.

이 놈의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들. 그러면서 내가 광주 애국 청년 학도들을 만나러 간다는 데 못 만나게 해.

이 백기완이 아직 안 죽었다고.

내가 광주 분들 경건하게 만나려고 한복도 다 데려놨는데, 이런 나쁜 자식들이.

신문 광고료는 책 팔리면 사정 되는 대로 내기로 했으니까, 모레 아침에 나갈 거요."

“선생님 그게 아닙니다.

제가 모시고 있는 국장의 걱정 병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DJ 대통령이나 청와대는 물론, 광주시장도 선생님 강연이 예정된 것도 취소된 것도 모릅니다.

어디에 보고도 안됐고 언론에 릴리스도 안 한 상태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그런 말 하지 마소.

그러면 왜 갑자기 강연이 취소 되냐고?

DJ가 하지 말라고 안했으면 왜 취소되느냐고?

고재유 시장은 이런 일에 관심이 아예 없을 텐데."

“아닙니다. 그냥 사정이 생겨서.”

“도대체 그 사정이 무엇이냐고? 당신이라면 궁금 안 하겠어?”

그러시면서 자신이 박정희 정권 때부터 당한 탄압이 서러운지 달구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것이었다.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그 놈의 걱정이 도대체 무엇이여, 뭔 말이여,

나의 사랑하는 민족 민주 의 광주 영령들이여,

정의의 화신인 광주시민이여! 이 미천한 미력둥이 백기완이가 여러분들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 춤을 추겠다는데 막는 놈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 놈들은 천 벌을 받을 것이다."

백 선생님은 눈물콧물이 뒤범벅 된 채,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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