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애국가 바로잡기는 나라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일입니다. 국민을 더욱 아프고 불행하게 하는 일입니다.

민주국가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 의견을 발표할 권리는 있습니다. 더구나 이 나라의 精氣를 수호하는 광복회 의 대표로서 광복절 경축사는 민족화합과 미래 국가발전의 염원을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 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이 대한민국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좌익 진보 측 성향 이념과 우익 보수 측 성향의 국민 간에 정치적 대립 갈등이 너무 큰 문제라 할 것입니다.

아직도 국민 상당수는 반제국·반자본·반외세·반종속의 주체적 자주국가 건설을 지상의 과제로 두는 이들이 많습니다.

또 상당수 보수 인사들은 반공이데올로기 실현을 최고의 목표로 두는 이들도 많습니다.

남북 통일 문제보다 더 해결이 어려울 수도 있는 남남갈등해결의 최대의 난관극복은 이념으로 인해 서로를 원수로 삼지 않는데 있다 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일부 인사들은 6·25 동란의 원인과 책임을 북한에 두기보다는 공동책임으로 보고 있고, 천안함 폭파도 북한의 소행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강력히 희구하는 측의 입장에서는 현 정권의 이념적 지향성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 문재인 정권이 가장 강조하는 친일인사 청산 만해도 그렇습니다.

국제법 질서를 지키고 있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 이상 반일은 감정적 대처일 뿐이고 우리는 당연히 친일하여야 합니다.

한일 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일본이 싫으면 극일하고 승일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친일’도 그 사정과 속내를 살펴보고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 일본 편에 붙어서 자기만 잘 살겠다고 민족을 잊고 매국에 앞장 선 자도 있었습니다.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반민족 특위에서 고르고 고른 분이 천 여 명입니다.

일본 이기겠다고 일본 유학가고 배워서 기회를 기다린 분도 있습니다.

일본과 타협적 협조를 하는 척 하며 인재를 기르고 실력을 쌓자고 나선 분도 있습니다.

관료들도 다 다릅니다. 고종 때부터 관직에 있으면서 일본과 일하면서 일본의 과도한 수탈의 욕심을 막은 분도 있고 완장차고 설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반일 항일의 기치를 끝까지 들고 싸운 분들은 거의 대부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들이고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한 분들 이었을 뿐,

국내에서 1937년 중일 전쟁 이후에는 항일이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일본의 패망이 임박한 1944년 이후에는 일본으로서는 놋쇠 그릇 하나라도 차출 하여 전쟁무기로 쓰지 않으면 안 될 급박하고 살벌한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에 선 독립운동가들 을 추앙할 뿐, 민족주의나 근대화 추구의 애국 인사들은 전부 친일로 몰아 비난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주장은 스탈린의 하수인이 되어 공산주의를 이 땅에 심고 3부자 전제왕권을 수립하여 이 땅의 인민을 착취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추구 이념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사상적 편향과 몰입으로 인해, 제주 4·3의 비극을 전부 다 우익 경찰과 군인의 책임으로만 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말대로라면 박 헌영 노선을 따라 제주도에 인민 해방구라도 선포하고 지리산에서 월북을 못하는 빨치산도 다 받아들여야 했습니까?

여러분들은 독일에 협력을 넘어 부역한 비시정권자과 그들을 거역하지 못한 자들을 엄정하게 처벌한 불란서 드골을 예로 들어, 우리가 친일인사를 처벌하지 못한 것을 한탄합니다.

이 협력자들에 대한 처단은 지금도 불란서 내에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고, 앞장 서 엄벌 처단 여론을 조성한 까뮤마저도 자신의 판단이 잘 못 되었다고 크게 괴로워 한 적이 있습니다.

또 일본과 한국,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는 구체적인 상황이 매우 다릅니다.

우리는 40년 가까운 식민지 상태인 반면 그들은 불과 4,5년간의 내전 상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불란서의 경우 인종주의에 대한 반성이, 민족 내부 정서적으로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독일에 협력의 차원을 넘어 같은 불란서인 레지스탕스를 제압하는 데 앞 장 섰던 인사들을 사형시켰습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는 얼핏 보면 비슷한 면이 있는 듯 합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과관계 영향 요소가 서로 달라서 일반론으로 접근하면 늘 판단의 오류가 생깁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정이 다른 외국의 사례를 막무가내로 인용한 것 밖에 안 됩니다.

■‘애국가 바꾸기’는 친일 잔재 청산 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강박관념과 결백 증에서 비롯된 발작증세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개인적 행태분석을 하지 않아야 하나, 해악을 끼치는 일을 하고 있거나 하려는 경우에는 심리분석에 들어가야 합니다.

안 익태 작곡의 애국가 바꾸기는 일종의 극심한 결백 증 심리상태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주장을 최초로 꺼낸 이해영 교수는 소설가와 살아서 그런 지 심리적 추측과 부정확한 문헌에 의거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뭔 개 눈에는 뭣만 보인다고 ‘확증편향’ 병리현상도 아주 강합니다.

또 방송 연예인하고 살고 있어서 그런지 쇼 맨 십이 강하고 언론 플레이에 능합니다.

이 여자 저 여자 잘 도 바꾸어 잘 살듯이 기분 풀이 소설을 쓰며 잘 난 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조두남 작곡 선구자 가곡이 일본군 찬양 주장, ‘섬 집 아이’를 작곡한 이흥렬 선생 작곡 광주일고 교가의 친일 세뇌주장등은,

안익태 작곡 현재 일반 국민에게 아무 문제없이 불려 지고 있는 애국가를 바꾸기 위한 전략 전술의 서곡이었다고 봅니다.

이미 몇 몇 예술인 등에 의해 새 애국가가 만들어져 있고, 돌 침대 팔아먹으려는 듯 광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전략과 연계시키고,애국가 작곡을 자기 이름 남기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애국가가 좌파 예술인들의 결속을 다지는 이념 지표여야 합니까?

좌파 계열의 사학자나 예술가들의 문제점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타파, 절단’의 필이 꽂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주관 주장의 승리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관철 되고 획득 때까지 싸웁니다.

戀愛에도 강한 이유입니다.

그 일이 사회발전이나 국민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목표 관철을 위한 선동 선무만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애국가를 헌신적으로 만든 분을 마음대로 재단하여 그 분의 혼을 깔아뭉개야겠다는 그들의 심보와 배짱에 놀랍니다.

1906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숭실중학교를 퇴학당하자 일본과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서 활동한 음악가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체류하던 1930년부터 5년여에 걸쳐서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애국가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애국가를 부를 때에는 장엄히 애국의 정신으로 엄숙히 부르되, 특히 동해의 ‘해’와 백두산의 ‘백’에 힘을 주고 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는 더욱 힘 있게 충만한 애국심과 활기차게 부르십시오.”

애국가는 1936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가 주최한 3·1절 기념식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1940년 12월 20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안익태의 애국가를 인준했고, 임시의정원에서는 이듬해 제 33회 개원식부터 애국가를 제창했습니다.

광복되자 애국가는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국가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안익태가 친일행위자라는 논란이 일면서 애국가를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으나 그 때마다 여론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애국가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또 다시 등장하고, 일부 좌파 인사들은 틈을 엿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집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다가 좌파들, 이들의 두목 격이자 행동대장인 김원웅 광복회장의 입에서 815 경축사를 통하여 튀어 나온 것입니다.

다 짜여 진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영방송인 KBS 마저도 협조하고 한겨레, 경향 등 좌파 성향 신문들이 지원 사격을 해줍니다.

대통령과 민주당도 주판알을 튕기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대권주자들도 냄새를 맡고 손익계산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친일 청산’만큼 표를 긁어모으는 데 유효한 처방전은 없거든요.

김원웅 광복회장의 연설 주축이 된 “애국가 페기하고 새로운 국가 만들자” 주장은, 이해영의 ‘안 익태 케이스’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앵긴 대로 친일파로 몰아 얼굴에 똥칠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인 놀부들의 집합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멋대로 펴낸 친일 인명사전은 안익태에 대해

‘개별적인 친일 행위가 있는 인물’이라고 정의한 후, 1940년 황기 2600년 기념 봉축 음악인 ‘일본 축전곡’과 1942년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축하하는 ‘만주환상곡’을 작곡한 것을 대표적인 친일 행위로 지적합니다.

작곡가의 정치성을 놓고 국가의 자격을 따지자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노래는 시와 만나서 태어나는 새로운 생명체입니다.

애국가는 가사나 곡조 어디에도 친일적 요소는 찾을 수 없고 말 그대로 애국가입니다.

김 구 선생은 1945년 11월에 출간된 ‘한국애국가’에서 ‘애국가가 광복 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기술했습니다.

이렇듯 애국가는 광복군이 부르던 군가였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눈물짓던 국외교포들의 망향가였습니다.

또 국제적인 운동경기가 열릴 때는 온 국민이 열광하며 부르던 승전가였습니다.

대한인의 마음을 이어오고 정체성을 일깨워준 연가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애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독일 유학 당시 만주국 참사관 에하라 고이치 집에서 유숙한 것, 1938년 일본 풍의 관현악곡 ‘에텐라쿠’를 작곡한 것, 1942년 9월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만주환상곡’을 작곡하고 지휘한 것을 친일 행적으로 문제 삼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고창 앞바다에서 잡히는 밴댕이 창자 속만도 홍어 *만도 못한 자들의 속 알 머리입니다.

만주환상곡 작곡과 지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익태 선생은 독립투사가 아닙니다.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 출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것이지요.

이해영의 애국가를 불가리아 민요에서 표절했다는 주장도, 안익태 선생이 나찌 공작원이라는 주장도 소설가 여인의 세 번째 남편이 되어 소설 쓰는 것을 옆에서 배운 덕분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국가에 대한 논쟁은 있었습니다.

미국의 ‘별이 빛나는 깃발’은 영국 비어 홀에서 부르던 노래곡조였습니다.

독일 국가 ‘독일의 노래’ 는 1절은 독일의 팽창주의를 찬양했습니다. 2절은 성차별이 나옵니다. 그래서 3절만 부릅니다.

프랑스 ‘라마르세에즈’ 도 가사가 험합니다. 그래도 프랑스 국민이 220년을 넘게 불러온 역사성을 존중합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인간도 國家도 없습니다.

‘國歌’의 자격을 따지기 보다는 이미 역사요, 삶의 일부가 된 國歌를 지킴으로써 나라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校歌를 바꾸고 愛國歌를 바꾼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섣불리 역사를 청산하면, 역사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자기 나라 역사를 부정하는 국민은 부정적인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자기주장만을 관철하기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의견이 사회나 나라의 미래발전에 어떤 도움이 되는 가?를 기준으로 주장 필요여부를 따져야 합니다.

애국가를 새로 바꾸자는 주장은 하면 할수록 온 나라 온 민족이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질 것입니다.

저는 이 민족분열의 첩경인 비생산적인 논의를 꺼내는 분들의 속내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긴 글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더운 날씨 건승하십시오.

(2020. 8. 20.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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