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광주가 무궁히 발전하길 바라면서 띄우는 마지막 편지 4-5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오해’에 관한 이야기1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무엇일까?

나는 ‘오해’라고 본다.

인간은 오해로 인해 최고의 선인이 죄인이 되기도 하고, 오해를 받는 설움으로 인해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는 어떤 연유에서 탄생하여 한사람의 한 편의 인생을 비극으로 끝나게 하는 것일까?

인생은 정직하고 진지하게 살아야 하지만, 인생은 늘 雜誌의 표지처럼 통속하고 희극과 비극이 반반 섞인 한편의 드라마다.

인간은 개인 간에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자기 꼴 아지 대로 살아간다.

꼴 아지 는 형체도 있지만 얼과 혼이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이 배어 있다.

후자를 중시할수록 보이지 않는 가치 소위 영혼 등이나 자존감을 중시하는 삶을 산다.

인간의 삶이 복잡하고 할 말이 많고 예술이 끊임없이 이야기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별을 노래하는 고독한 이들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가치는 보이지 않는 것에 있고, 결국 세상을 세상답게 만드는 것은 영혼에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과 박원순의 자살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두 사람 다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분이다.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최고의 선물, 생명을 쉽게 버릴 만큼 경솔한 분도 아니다.

자신의 안일을 우선시하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다.

어느 날 부터인가, 오늘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하여 힘들고 연약하고 착한 이들을 위하여 이 한 인생 바치겠다고 산 사람이다.

두 분 다 두 번을 뵙고 이 분들의 깊은 속내를 살펴보았다.

노무현의 특성은 정 주영 당시 전경련회장을 상대로 한 권력과의 유착을 따지는 증인 심문에서 잘 나온다.

그는 노동 운동을 하는 이들의 변호활동을 하면서 그가 평소에 가졌던 사회변혁의 의지를 다졌고 정치에 투신하였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현상타파의 정신을 실제로 행동으로 관철한 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좌파 정치 철학을 실천한 자다.

내가 노 무현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고향의 마을에 토담집을 짓고 사법고시를 준비하여 3년의 공부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고시계’라는 잡지에 기고한 합격기를 읽으면서였다.

그 머리 좋다는 내 작은 아버님이 대흥사 북암에서 홀로 공부하여 0.03차이로 낙방한 사법시험( 떨어진 후 행정고시를 준비하여 바로 합격하였지만), 단 20명만 뽑아 논리적 사고에 약한 여자들은 한 명도 합격을 못한 적이 많았던 사법시험,

남진 가수와 친한 박주선 선배가 광주리에 채소를 파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뚝심으로 밀어붙여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사법시험,

지금은 엉터리 같은 영혼도 철학도 없는 판검사들이 우글우글 모여, 이 나라를 망치는 데 일조하고 있는 사법시험,

돈은 있는데 권력이 없어 서러움을 당해본 자들이 기어이 딸을 열쇠 몇 개라도 안겨 시집보내고 싶은 사법시험,

진정한 연애도 별로 안 해보고 남들 다한다는 데모도 안 하고, 소설 책 한 권도 안 읽고 눈물 흐리며 본 영화 몇 편도 없고,

그런 자들이 안 희정과 여비서 간의 바람난 스캔들을 성폭력으로 간주해 감옥에 처넣는 판검사들을 배출하는 사법시험,

아, 내가 뉴욕의 한 미술관에 만났던 머리가 파 뿌리처럼 하애진 어느 한 여인의 가슴에 대 못을 박은이들이 반성 한마디 안 하는 가슴에 털 난 자들이 널려 있는자들을 큰 소리치게 발판이 되는 사법시험,

단지 사회주의 사상반정부 활동을 꿈꾸었다는 이유로 인혁당 사건 간첩으로 몰아,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는 일에 부역하는 자들의 온실이 되는 사법시험,

오살 나게 목에 힘주고 세상 물정도 모르면서 법전에 대입하여 밀떡 가래떡 뽑듯이 죄인을 양산하면서, 위대한 판결이라도 내리는 양 법복을 고쳐 입고 자빠져 있는 이들을 배출하는 사법시험,

나의 중학생 시절 그 때는 그렇게 많은 사법부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줄 몰랐던 시절,

효봉 스님이 법복을 벗어던지고 전국을 엿장수로 떠돌게 한 그 사법시험에,

환한 미소라고는 없는 한 청년이 부산상고 졸업 학력으로 ‘나는 이렇게 공부해서 합격했노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 글에 있던 권 양숙 여사와의 풋풋한 러브 스토리도 가슴을 뛰게 했던 듯하다.

나는 노무현의 홀로 가는 길을 좋아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세상을 바꾸어야합니다.”는 연설을 할 때는 늘 모난 돌로 찍혀 조사 져 버리는 일을 수없이 당해 맺혀 있던 내 한을 풀어주는 듯 했다.

“아들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말 잘 듣고 살아라.”

당신은 당신 어머님이 하던 말씀이라 하였지만,

나는 내 어머님으로부터 귀에 닳도록 들은 말이라서 눈물이 찔끔 났다.

나는 노무현과 그의 친구들이 지난 여름 무슨 사과를 따 먹었고, 어느 여학생 뒤꽁무니를 쫓아다녔고, 어느 영화관에서 두 편 동시 상영 영화를 보았는지를 다 알아 분 사람이다.

노무현은 움막집에서 공부하다가는 정보에 어두워 불리했다고 판단했는지, 권양숙 여사가 보챘는지 책보를 싸들고 서울로 갔다.

권 양숙 여사가 챙겨준 돈 몇 만원을 바지 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고 서울 성북동 삼선고시원에 둥지를 틀었다.

그때 고시원 고참으로 텃세를 부리던 김 병준과 시비가 붙었다.

“라면을 끓여먹었으면 주변은 칼칼 이 정리해놓아야 할 것 아니가. 새로 들어온 신입생이 빵 조각 하나도 안 돌리고 말이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소여물 통 삶아 묵었나? 코는 왜 그리 크게 고나?

방영준! 환경부에서 정해놓은 소음규제 대상에 코 고는 소리는 없나?"

넉살 좋은 방영준이 슬슬 쪼개며 나타났다.

“우리는 전우 아니 고난의 시절을 함께 보낸 동지여유.

새로 왔지만 우리 식구로 좋게 지냅시다.

다 지나고 보면 추억 이어 유.

우리 봄 날 이니 미팅이나 한 번 하러갑시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지 유. 내가 어제 성신여대 앞 빵집에 갔다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매운 스파게티 사준다고 여대 대학생들 꼬셨어유. 같이 가시지유."

“ 지금 바빠 죽겠는 데, 무슨 얼어 죽을 미팅은 미팅인교.

미팅 못하다 환장 빙 걸려 죽은 귀신이라도 있나.

나는 그런 짓은 안 한다 카이. 당신들이나 데이트를 하든지 미팅을 하든지 살림을 차리든지 알아서 하소."

성질이 대쪽 같은 노무현은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고 나가버렸다.

정 주영은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다.

사업이나 일의 판단과 결정에 천부적인 동물적 감각을 지닌 분이다.

노무현은 정주영을 노조활동을 탄압한다고 다그쳤으나 정 주영은 노련하게 받아쳤다.

“제가 몸을 써서 사업을 해온 사람이라 누구보다도 육체노동자들의 애환을 많이 압니다.

직원들에게 많이 혜택을 주고 싶어도 곳간에 뭐가 있어야 줄 것 아닙니까?

저는 제 직원들에게 잘 해주고 싶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정권 눈치 볼 틈도 없습니다.

위에서 나라에서 좋은 일 한다는 데 돈이 필요하다하니 그런 갑 다 하고 돈 좀 낸 것이지요.

저는 이 것 저 것 따질 힘이 없습니다.

저는 데모꾼도 정치꾼도 아니고 그저 돈 벌어서 수출 많이 해서 우리 현대 직원들 자식 쑥쑥 낳고 걱정 없이 일하게 하고 싶은 욕심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 때 노무현이 미움이나 정의감만으로 정치를 하기 보다는 사랑으로 정치를 하는 노무현이 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끝끝내 그 말은 가슴에 남겨둔 채 하지 못했다.

우리나라 5대 구라로 손색이 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방영준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라 전부 실화다.

나는 방 선배님의 이야기가 하고 재미있어 돈암동 돼지고기 주물 럭 구이 집에서는 연탄불에 내 랜드로버 구두가 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소고기가 너무 타는 데 여주인은 불판을 안 바꿔준다고 투정했다.

그건 그렇고 멀리서만 지켜보고 응원하던 노무현을 뵙게 된 것은 2007년 ‘5.18 민주화 운동 27주년 기념식’ 에 노대통령이 참석한 다음날 5월 19일이었다.

우리 운동권 출신들은 이제는 아스라이 멀어진 옛일이 되었지만 518이 돌아오면 혼자서 쓸쓸히 또는 여럿이 모여 통음을 한다.

그리고 집으로 홀로 가는 길에 나에게 묻는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묻는다.

“잘 가십시오, 잘 있으십시오. 영령들이여 늘 안녕히 계십시오. 동지여. 제가 당신께 드릴 맹세는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는 말 밖에는 없습니다."

술 이 덜 깬 비몽사몽의 아침, 평소 가까이 지내던 무등산 공원 관리사무소장 임희진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 국장님, 신국장님, 오늘 노무현 대통령이 무등산에 와서 정상까지 오른다는 데 제가 안내를 하게 됐단 말입니다.

신국장님도 같이 와서 삼인행으로 올라가면 안 될까요?"

"광주에 노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도 많은 디 내가 뭣 하러 가요? 정찬용이랑 같이 가라고 하시오?

노무현 재단 사람들하고 가든지."

"아니란 말입니다. 이런 수행은 공무원이 하게 되어 있어서 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는 수줍음이 많아서.

우리 광주에서 노대통령하고 제일 통할 사람은 국장님일 것 같아서요."

"내가 통하기는 뭣이 통해요. 친구 분들 몇 사람 아는 것 빼고는. 알았소. 2인행은 좀 재미가 없기는 합니다."

그렇게 우리 셋은 걸어 무등을 올랐다.

“제가 약속은 지켰지요. 1999년인가 제가 광주시민들에게 약속을 했지요.

국회의원 시절 시민단체 초청 강연에 왔다가, 그 날 저녁 뒷풀이 술자리에서 촌놈이 호기를 부렸다 아닙니까.

광주시민 아니 이 자리에 계신 어른 분들께서 이 부족한 저를 대통령을 만들어주면 무등산을 찾아와 인사를 드리겠다."고 했지요.

노대통령은 임소장과 국장인 나의 직급을 혼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승진을 못해 만년 국장으로 열 받은 나를 과장으로 생각하고 임 소장을 나의 상사인 국장으로 알았다.

잠시 쉬었다 갑시다.

“임 국장님, 어디 막걸리 한 잔 없소?”

눈치가 빠르고 동작이 날 쌘 임소장이 말했다.

“네네, 제가 급히 무전기로 연락해서 막걸리 몇 병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우선 오이라도 좀 드십시오.”

내가 누구인가. 천하의 신 광조 아니던가.

나는 산에 오르면 빈 손 으로 갈 때도 가끔은 있지만

여느 때는 보해 잎 새 주 한 병과, 화순 백아 산 막걸리 두병, 오이 몇 개 그리고 초콜렛을 넣고 다닌다. 소고기 말린 것도 넣고 다닌다.

"대통령님 오늘 제가 무등산 막걸리를 준비했습니다.

막걸리 맛은 부산 금정산에서 등산 후 파전에다 먹는 맛이 최고입니다. 그 맛만은 못하지만 요기라도. "

“신과장님은 부산에서 학교 나왔나요?”

그 때 임소장이 나섰다.

‘아닙니다. 우리 국장님은 세상만사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자갈치 시장 아줌마들하고도 친합니다."

그 때 갑자기 경호원 둘이 나타났다.

“아니 되옵니다. 막걸리는 경호 상 안됩니다. 내려가시면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잔을 들고 있는 나를 쬐려 보았다. "

그 때 노대통령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에이 씨 깝깝한 세상, 내가, 대통령이 막걸리 한 잔 먹겠다는 데 그것도 안 된다고. 더러 버서 대통령 해 먹겠나.

추접스러워서 안 먹는다.

그래요 힘없는 놈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나.

대신 신 과장 훗날 막걸리 한 잔 사주이소"

기분 나쁘게 노대통령은 내 직급을 올려주기는커녕 강등시키고도 훗날 막걸리만 사주라고 했다.

정상에 올랐다.

방명록에 세 자를 썼다.

“아, 좋다!”

2011년 무등산 관리를 책임지는 환경생태국장 시절이다.

한 지역구 이전 대상지역 국회의원은 온 열정을 불태워 만들어놓은 무등산 정상 방공포 이전 계획을 방해하여 나를 미치게 했다.

아직도 이전을 못하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고창 출신 공군 감찰실장은 자신이 고교를 다닌 광주에 드리는 선물이라고 밤낮을 뛰어다니는 나를 격려하고 모든 어려운 문제를 자신의 직을 걸고 다 해주었다.

반면 광주에서 뽐내는 좋은 고교를 나와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이는,

국회의원 더 해먹는데 장애가 될 까봐,

무등산 정상을 마음대로 올라 시민들의 스트레스를 풀게 하려는 나의 순정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노대통령은 나를 국장으로 불러주지도 않고 허무하게 떠났다.

나는 2011년 노무현 대통령이 올랐던 그 길을 노무현로로 고시하는 것으로 경건한 존경을 바쳤다.

그의 죽음을 접하고, 너무나 눈물이 날 것 같아 문상도 안 갔다.

“담배 있나? 담배 하나 주게” 마지막 그 말이 그 목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노대통령은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소탈하고 인간적이었다.

반면 권 양숙 여사는 여자인지라 엉겁결에 시계를 받았다.

시계 하나 받은 것이 그렇게 큰 죄일까?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업무처리와의 관련성도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이 없는 세상이 한없이 슬펐다.

자신의 마음을 본 심을 알아줄 사람은 더 이상 없다고 보았다.

혹시 담배가 나를 위안할 수 있을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인생은 하숙생, 나그네였다.

차라리 죽고 나면 그래도 나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애 쓰는 이 혹시 라도 있을까.

보고픈 사람 그리운 사람을 두고 그는 슬프게 갔다.

그는 악과 불의에 맞서 싸울 용기는 누구보다 강했지만, 오해와 맞서 싸울 용기는 없었다.

인간의 오해는 거대한 바위와 같다.

이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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