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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원 칼럼】독립운동가 姜振遠 의병장 생애와 활동 기록 誤謬 바로잡아야- 국가보훈처, 한민족대백과, 두산백과, 진주강씨중앙종보 기록 모두 고쳐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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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03.1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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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보훈처에서 “2006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된 “의병장 강진원 장군(義兵長 姜振遠 將軍)”의 추모 순의비(殉義碑)가 순천시 조비길 36(석현동 230) 향림사 공원에 있다.

성산(聖山) 강진원(姜振遠) 장군(1878.3.15.~1921.12.29. 생존)은 전남(全南) 승주군(昇州郡) 쌍암면(雙巖面) 두모리(斗毛里) 신기(新基) 마을에서 부친 晋州姜氏 대룡(大龍 : 字) 仁瑞)씨와 모친 경주김씨의 아들로 포태(胞胎)하여 승주군 서면(西面) 당천리(堂川里)에서 1878년 3월 15일 가난한 양반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큰형 忠遠, 둘째형 孝遠, 막내 동생 振遠이 있었으나, 큰형 忠遠이 부친 大龍의 큰형 大有의 후손을 잇기 위한 養子로 신분변동이 되면서 친형제였던 큰형 忠遠과 막내 동생 振遠이 족보상 사촌이 되었다.

姜忠遠의 차남 『조국을 사랑한 일본 오오사카의 큰별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 : 1914년 음력 8월 15일~1983년 양력 8월 21일, 향년 70세)』 선생은 이런 신분변동으로 인해로 강진원(姜振遠) 장군의 당질(堂姪)이 되었다.

姜振遠 장군의 출생지에 관한 혼선을 정리하면, 승주군 쌍암면 두모리는 외가(外家)이며, 서면 당천리는 친가(親家)였다. 대체로 외가에서 태어나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지만 그는 반대로 태어난 셈이다. 아마도 그의 부친 大龍씨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의학에도 능통하여 한때 한약국을 개설한 적도 있었으나 가족의 안식처인 집 한 칸 없이 곁방살이를 할 정도로 빈궁하였는데, 더욱이 일찍이 세상을 떠나 남은 가족은 쌍암면(雙巖面) 두모리(斗毛里) 신기(新基) 마을 外家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은 너무나 가난했다.

승주군(昇州郡) 쌍암면(雙巖面) 두모리(斗毛里)는 1910년은 두모리(斗毛里), 1914년은 두월리(斗月里)로 변천되었다. 또한 승주군(昇州郡) 쌍암면(雙巖面)은 1983년 3월 14일 昇州邑으로 변경되었고, 1995년 1월 1일 정부의 都市農村 행정구역 통합 정책에거 승주군은 통합 순천시(順天市)로 변경되었다.

여기에서 강진원(姜振遠) 의병장의 출생연월일, 의병활동 연월일, 사망 연월일의 기록은 당시 국가나 사회, 각종 族譜 등 모두 태음력(太陰曆)을 사용하였음으로 이하 태음력으로 기록하기로 한다.

민족문화협회 편찬실에서 저술하여 횃불사에서1981년도에 출판한 『강진원 의병장 약전 (姜振遠 義兵將 略傳)』에는 그가 1878년 3월 15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1881년 7월 30일생으로 정리되어 있다. 또한 그가 체포될 당시 신문기사에는 42세로, 그가 체포되는 과정을 목격한 제자 장영섭은 41세로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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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장영섭의 증언이 가장 정확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대체적인 주장이 제기 되었다. 오랫동안 강진원을 돌보며 공부했던 장영섭이 스승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던 중 너무나 의심스럽다고 생각되고 아무래도 親家쪽인 晋州姜氏 譜學전문가에게 마지막 확인이라는 생각으로 前 진주강씨 중앙종회장 선웅건설 강태수(姜太秀) 대표와 진주강씨 광주전남 보학회 강충웅 회장에게 諮問해본 결과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 제19권 1025 페이지에 의하면 “의병장 강진원 장군(義兵長 姜振遠 將軍)” 출생연월일은 1878년(戊寅) 3월 15일에 태어 나셨고, 別世하신때는 1921년(辛酉) 12월 29일이라고 확인해주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당천리와 신기마을을 오가며 성장했다고 전한다. 집안은 빈궁하였지만 어려서부터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면서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로 성장하였다. 비록 가난한 선비였지만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서당을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힘써왔다. 구한말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일제 침략의 마수가 우리 강토로 뻗어오자 선생을 서당 훈장으로만 머물게 하지 않았다.특히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따른 국권상실의 위기는 충효의 의리를 중시하는 선생의 피를 끓게 하였다. 평소부터 임진왜란(1592~1598) 당시 구국의 영웅 삼도수군통제사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과 임진왜란 발발 초기 1592년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광양 형제의병장(兄弟義兵將) 강희보(姜希輔, 1561~1592)와 강희열(姜希悅, 1562~1592)의 護國精神에 깊이 감명받아왔던 선생은 1906년 전라도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유림대회를 열어 의병봉기를 호소하고, 몸소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의 영향으로 호남은 의병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갔다.

이 시기 선생은 최익현의 문인들과 시국에 대해 논의하며 거의를 모색하였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1907년 들어 정세는 더욱 악화되어 국망(國亡)의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일명 韓日新協約으로 일제의 국권침탈은 더욱 강화되고, 군대는 강제 해산되어 민족의 무력은 박탈된 것이다.

國亡의 상황이 닥치자 전국의 유생은 물론 해산군인과 일반 국민들까지도 의병전쟁에 뛰어들었다.

강진원(姜振遠) 의병부대(義兵部隊)는 1908년 음력 6월 하순 민가에서 총기를 거두는 것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조계산을 근거지로 삼아 무기를 수리하고 의병의 규모를 확대하는데 노력하였다. 음력 7월 인근에서 활동중인 조규하 의병장과 만나 연합투쟁을 모색하였으며, 나주의 의병들이 그의 의병부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이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취웅록」에 의하면 1908년 음력 8월 하순 이들은 93명이었는데, 다음해 음력 4월 하순 237명으로 증가하였다. 물론 1909년 음력 4월에는 곡성의 서순일(徐淳一) 의병부대와 합세했을 때의 규모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들이 꾸준히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병장 강진원(姜振遠) 장군 순의비(殉義碑)에는 500명의 의병을 모집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선웅건설(善雄建設) 강태수(姜太秀) 會長이 편집 발행한 『湖山 姜桂重 傳記, P525』 제3판(1999.11.25. 圖書出版 藝苑) 121페이지에는 ″강의사는 서순일(徐淳一)을 비롯 800여 명의 의병을 모아″라고 기록되어있다.

일본측 역시 강진원 의병부대의 규모를 파악하고 있다. 이를테면 일제는 1909년 6월에는 이들을 100명, 7월에는 70명, 9월에 23명, 10월에 20명으로 감소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급격하게 감소된 배경에는 1909년 음력 6월 중순 순천시 서면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기습을 당한 사건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1908년 7월 순천에서 선생을 의병장으로 하고, 김화삼을 선봉대장, 김병학을 수포대장, 김명거를 행군대장으로 하는 의병부대도 봉기하였다. 그리하여 조계산을 근거지로 삼아 의병활동에 나섰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군율을 엄히 하여 주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으며, 8월 4일부터 곡성 조지촌전투를 시작으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이후 선생의 의병부대 단독으로 또는 조규하 의병부대 등 인근에서 활동 중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1909년 8월까지 약 1년여 동안 줄기찬 투쟁을 벌였다.

선생의 항일투쟁은 전남 동부지역인 순천·곡성·여수·고흥·광양·구례와 전북 남원을 무대로 일제의 침탈기관과 일본군경을 공격대상으로 수행되었다. 주요 전투로는 순천 괴목장전투, 과역시장전투, 동복 운월치전투, 쌍암 접치전투와 서정전투, 남원 가정전투, 곡성 압록전투와 동리사전투 등이 있다.

그러던 중 1909년 6월 순천시 서면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 대부분이 뿔뿔이 흩어졌고, 선생 또한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경남 통영의 연내도(蓮內島)로 피신하였다.

강진원 의병부대는 1909년 9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큰 타격을 받고서 해산된 것으로 믿어진다. 이처럼 빨리 해산됨으로써 강진원 의병부대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에 상대적으로 피해를 적게 입은 것으로 보인다.

연내도로 피신한 강진원은 일본군의 무자비한 군사작전이 종료되자 순천으로 돌아왔다. 그는 서당을 개설했던 쌍암면 두모리에 위치한 오성산(五聖山) 동굴에 은신하며 서당을 개설하여 아동들을 가르쳤다. 아마도 은신하는 기간에 남평문씨와 혼인하여 1남1녀를 두었으나, 1921년 여름 모자가 홍역을 앓다가 동시에 사망하고, 그후 어린 딸마져도 홍역으로 사망하여 유족마저도 없는 불운한 가족이었다. 오성산 동굴에 은신해 있으면서 그는 아동들을 가르쳤다. 때로 제자들이 심경을 물으면 그는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는 한마디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10여 년 동안 장영섭을 비롯한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은신해 있던 중 1910년 한일 합방후 일제의 강력한 의병부대 토벌로 1921년 7월 16일승주읍 두모리 외가 장영섭(長永燮)의 집에서 일본군 헌병부대에 포위되어 이 순간에도 칼을 빼들고 우두머리 『마쓰다』를 죽이고 저항하다가 체포되었고 7월 19일 옥중에서 향년 42세를 일기로 그는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옥중에서 스스로 혀를 물고 자결한 것으로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였던 것이다. 라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되어 있으나, 한민족 대백과 사전에는 姜振遠 장군은 1921년 7월 16일 체포되어 헌병대에 이송후 10월에 순국(殉國)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 제19권 1025 페이지에는 음력 12월 29일에 순국(殉國)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따라서 체포된 후 3일 만인 7월 19일 혀를 깨물고 자결하였다는 기록은 대단히 잘 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한 기록이 있는데 진주강씨 박사공판 대동보 제19권 1025 페이지에 의하면姜振遠 장군은 출생일 1878년 음력 3월 15일로부터 향년 44세인 1921년(辛酉) 음력 12월 29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일본군에 1921년 음력 7월 16일 체포되어 일본군 헌병부대에 이송되었고, 모진 고문으로부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음력 7월 19일 자신의 혀를 깨물어 자결을 시도했으나 바로 사망하지 않았고 고문을 통하여 유일한 증언수단인 팔과 손을 이용한 의병활동에 관한 자백서를 받고자 온 갖 고문의 만행을 자행했으나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끝까지 비밀을 지키며 그해 음력 12월 29일 사망하자 일본군 헌병부대는 친가 쪽에 옥중 사망 사실을 알렸고 이 날을 姜振遠 장군의 사망 연월일로 진주강씨 박사공판 대동보 제19권 1025 페이지에 등재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구국공적을 종합해보면 姜振遠장군은 전라남도 순천 출신의 구한말 의병장이다. 그는 농민과 다름없는 가난한 서생이었다. 더욱이 가정환경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국가와 민족의 위기가 닥치자 일신과 가족의 안위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우선시하였다. 1년여 동안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반일투쟁을 적극 전개하는 한편, 주민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안민적(安民的) 의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던 구국 충정의 護國人物이었다.

그러나 姜振遠 장군의 사후 47년 동안 거룩한 공덕은 잊혀져가고 직계가족이 없어 추모사업 조차 제대로 추진 되지 못한 현실을 너무나 안타깝게 여겨오던 중 진주강씨 순천종회 초대 강형원 종회장 재임시인 1968년 12월 31일 성산양로원 회원 일동이 지방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향림사 사찰소유 시민공원에 비를 세우고 이듬해부터 매년 3月 3日과 7月 16日을 年二回 大祭를 거행해왔다.

1971년 4월 16일 진주강씨 순천종회 2대 姜敬洙 會長이 選任된 후1971년 11월 12일 秋季 總會에서 그 동안 매년 음력 3月 3日과 7月 16日 年二回 大祭日을 年日 一回로 單一化하여 매년 陰曆 3月 15日 진주강씨 순천종회에서 追慕祭를 거행하여오고 있다.

2007년 6월 순천보훈지청의 지원과 진주강씨 순천청년회의 주관으로 이 비를 개보수한 『제55-1-35호 국가보훈청지정 현충시설물 』로 관리자 지정이 된후에도 진주강씨 순천종회에서 매년 음력 3월 15일 거행하던 추모제는 2012년 4월 14일부터 매년 양력 4월 둘째주 토요일에 추모제를 모셔오고 있다.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 제19권 1025페이지에 기록된 姜振遠의 직계자녀는 아들 2명, 딸1명으로 어린시절 홍역으로 죽었고, 養子인 博士公 27세손 聲哲( 初諱 宇哲 : 生父 希遠)이 게재되어있다. 聲哲의 家系系譜를 보면 24세 영필의 子 민수․ 중수, 영칠의 子 일수(日秀)→25세 중수의 자 대일, 日秀의 子 大有, 대룡(大龍 : 字 仁瑞) →26세 대일의 子 希遠, 大有 子 忠遠(生父 大龍), 大龍 子 忠遠(養父 大有), 孝遠(字 경팔), 振遠- 27세 希遠의 성수 ․ 聲哲, 忠遠 子聲善(吉元), 聲昊(桂重),聲順(吉淳), 聲台(吉泰), 聲滿(佶滿) / 振遠 子聲哲( 初諱 宇哲 : 生父 希遠)이다.

정부는 의병장 강진원 장군(義兵長 姜振遠 將軍)의 구국 항일투쟁의 독립운동 功績을 認定해 死後 56년이 지난 1977년 11월 13일 建國勳章 獨立章을 추서(追敍)하였고,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死後 85년이 지난 2006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姜振遠 장군에 대한 姓名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字는 형우(亨佑)·형원(亨遠), 號는 성산(聖山)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럽다. 일본측 자료에는 본명으로 알려진 강진원이나 자와 호인 형우·형원·성산 등으로 적혀진 경우가 전혀 없다. 대신에 일본측 자료에 그는 강승우(姜勝宇)·강승지(姜承旨)·강여명(姜汝明)·강의연(姜義淵)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동일인으로 보여진다. 아울러 1921년 7월 체포될 때 강형오(姜炯吾) 역시 그의 이름이므로 그는 변성명에 능통했던 인물이라 이해된다. 아마도 그의 본명은 강진원(姜振遠 혹은 姜震遠), 자는 형오(혹은 亨佑), 의병활동 시에는 강승우를 비롯한 몇 개의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믿어진다. 당시 의병장 가운데 상당수가 가명 혹은 별칭을 사용한 사실을 보더라도 그 역시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의병들이 가명이나 별칭을 사용한 이유는 일본군경의 추적을 피할 의도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매우 다양하게 일본군경에 포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진원(姜振遠) 의병장 姓名에 관한 여러 가지 다른 주장에 대하여제자 장영섭(張永燮)보다는 親家쪽인 晋州姜氏 譜學전문가인 전 진주강씨 중앙종회장 선웅건설 姜太秀 대표, 진주강씨 광주전남 보학회 강충웅 회장에게 諮問 결과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 제19권 1025 페이지에 의하면 26세손 본명은 진원(振遠)이고 처음 이름(初諱)은 亨遠, 字는 亨佑라고 확인해주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의 2006년 7월 14일 순천대 사학과 홍영기 〔공훈선양학술강연회 주제 발표자료〕 《2006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산(聖山) 강진원(姜振遠) 의병장》 기록의 〈강진원의 생애와 활동〉 기록을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이 세가지 측면에서 부실 학술조사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러한 오류는 親家쪽인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 제19권 1025페이지 등 현존 관련 문서 검증을 하지 않고 주변사람인 제자 장영섭의 증언에 의존한 부실 학술조사의 탓으로 보인다.

첫 번째, 성명은 강진원(姜振遠) 이 바른 표기인데 강진원(姜震遠)으로 잘 못 기록 되어있다.

두 번째, 출생 년월일은 1878년(戊寅年) 음력 3월 15일 인데 1881년(辛巳年) 음력 7월 30일로 잘못 기록 되어 있다.

세 번째 사망 연월일도 1921년(辛酉年) 음력 12월 29일이 바른 표기이나 1921년(辛酉年) 음력 7월 19일로 잘못 기록 되어있다.

네 번째, 부친성명은 〈대룡(大龍)〉인데, 〈대길(大吉 혹은 太三)〉로 잘 못 기록되어 있다.

다섯 번째, 〈강씨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강희열(姜希悅)의 후손〉이라는 기록에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잘못이다.

우선 두 사람은 같은 晋州姜氏로 고구려 제26대 영양왕대 병마도원수(560~642) 姜以式 장군의 후손이지만 서로 선조인 中始祖가 다르다. 강희열(姜希悅)은 고려 8대 현종때 거란 침략을 물리친 병마부원수 姜民瞻 장군(963~1021)의 14세 손으로 殷烈公(民瞻)派이고, 강진원(姜振遠)은 1274년 고려 24대 원종때 국자감박사 姜啓庸의 26세손으로 博士公(啓庸)派이다. 너무나 부실한 학술강연 발표자료에 심히 유감으로 보며 이런 잘못은 하루 빨리 바로 잡아야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구국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강진원(姜振遠) 장군의 생애와 활동은 모 두 오류 투성이어서 이를 하루 빨리 모두 바로 잡아야 하겠다.

오류 내용을 고찰해 보면, 성명(姓名) 오류는 국가 보훈처〈2006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산(聖山) 강진원(姜震遠) 의병장〉의 〈姜震遠〉, 출생년월일 오류는 국가보훈처 〈2006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산(聖山) 강진원(姜震遠) 의병장〉, 한민족대백과사전의 강진원(姜振遠), 두산백과의 강진원(姜振遠), 2016년 2월 20일 진강씨중앙종보 제472호 제4면 필자의 동의도 없이 게재된 〈독립운동가 순천 의병장 성산 강진원 장군 순의비〉의 〈1881년 7월 30일〉, 사망년월일 오류는 국가보훈처 〈2006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산(聖山) 강진원(姜震遠) 의병장〉, 한민족대백과사전의 강진원(姜振遠), 두산백과의 강진원(姜振遠), 2016년 2월 20일 진주강씨중앙종보 제472호 제4면 필자의 동의도 없이 게재된 〈독립운동가 순천 의병장 성산 강진원 장군 순의비〉의 〈1921년 7월 19일〉, 한민족대백과사전의 강진원(姜振遠)의 〈1921년 10월〉, 그의 父親의 姓名 오류는 국가보훈처 〈2006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산(聖山) 강진원(姜震遠) 의병장〉의 〈대길(大吉 혹은 太三)〉, 家系系譜에 관한 오류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강희열(姜希悅)의 후손〉 이라는 기록은 모두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 기록을 바로 잡야할 근거인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 제19권 1025 페이지에 의하면 “의병장 강진원 장군(義兵長 姜振遠 將軍)” 姓名은 강진원(姜振遠),출생연월일은 1878년(戊寅) 음력 3월 15일에 태어 나셨고, 別世하신때는 1921년(辛酉) 음력 12월 29일이라는 기록이 확인되었고, 父親의 姓名은 姜大龍, 家系系譜는 우선 두 사람은 같은 晋州姜氏로 고구려 제26대 영양왕대 병마도원수(560~642) 姜以式 장군의 후손이지만 서로 中始祖가 다르다. 강희열(姜希悅)은 고려 8대 현종때 거란 침략을 물리친 병마원수 姜民瞻 장군(963~1021)의 14세 손으로 殷烈公(民瞻)派이고, 강진원(姜振遠)은 1274년 고려 24대 원종때 국자감박사 姜啓庸의 26세손으로 博士公(啓庸)派이며, 통정공 회백(淮伯)의 20세손, 문량공 희맹(希孟) 22세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존의 오류기록은 姓名은 강진원(姜振遠),출생연월일 1878년(戊寅) 음력 3월 15일, 사망년월일은 1921년(辛酉) 음력 12월 29일, 父親의 姓名은 姜大龍, 家系系譜는 1274년 고려 24대 원종때 국자감박사 姜啓庸의 26세손으로 博士公(啓庸)派이며,통정공 회백(淮伯)의 20세손, 문량공 희맹(希孟) 22세손로 모두 바로 잡아야 하겠다.

● 강진원(姜振遠) 의병장 姓名과 生存年月日에 대한 史料 考察

筆者는 강진원(姜珍遠)은 진주강씨 광주전남종회 副會長 兼 編輯委員이다. 강진원(姜振遠) 의병장 姓名과 생존년월일에 대한 주장이 각양각색이어서 너무나 의심스러워 晋州姜氏 譜學전문가인 전 진주강씨 중앙종회장 선웅건설 姜太秀 대표와 진주강씨 광주전남 보학회 강충웅 회장에게 諮問한 결과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 제19권 1025페이지를 보고 姓名에과 생존연월일에 관하여 확인해주시어 두분 회장에게 감사드리며 아래에 그내용을 그대로 기록해 앞으로 논란이 없도록 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강진원(姜振遠) 의병장의 출생연월일, 의병활동 년월일, 사망연월일의 기록은 당시 국가나 사회, 각종 族譜 등 모두 태음력(太陰曆)을 사용하였음으로 이하 태음력으로 기록하기로 한다.

1. 강진원(姜振遠) 의병장 姓名에 관한 고찰

순천 향림사 강진원 장군 순의비, 한민족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위키백과사전,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 제19권 1025페이지에는 강진원(姜振遠), <자>형원(亨遠), <호>성산(聖山) 으로 기록되어 있고,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2006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자료, 다음백과 사전에는 강진원(姜震遠)으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譜學전문가인 전 진주강씨 중앙종회 강태수 회장과 진주강씨 광주전남 보학회 강충웅 회장에게 諮問 결과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에 의하면 26세손 본명은 진원(振遠)이고 처음 이름(初諱)은 亨遠, 字는 亨佑라고 확인해주었다.

2. 강진원(姜振遠) 의병장 생존년월일에 관한 고찰

민족문화협회 편찬실에서 저술하여 횃불사에서1981년도에 출판한 『강진원 의병장 약전 (姜振遠 義兵將 略傳)』과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 제19권 1025 페이지에는그가 1878년 음력 3월 15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1881년 음력 7월 30일 출생으로 되어있다. 또한 실제 사망 년월일도 1921년 12월 29일되 확인되었으나 제자 장영섭의 사망 증언일인 1921년 음력 7월 19일로 사망년월일을 국가보훈처 자료에 잘 못 표기 되어있다. 그래서 親家쪽 譜學전문가이신 前 진주강씨 중앙종회 姜太秀 會長과 진주강씨 광주전남 보학회 강충웅 회장에게 諮問 결과 晋州姜氏 博士公派 大東譜에 의하면 출생연월일은 1878년(戊寅) 음력 3월 15일에 태어 나셨고, 別世하신때는 1921년(辛酉) 음력 12월 29일이라고 확인해주었다.

3. 강진원(姜振遠)이 강희열(姜希悅)의 후손이라는 주장에 관한 고찰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의 2006년 7월 14일 순천대 사학과 홍영기 〔공훈선양학술강연회 주제 발표자료〕 《2006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산(聖山) 강진원(姜振遠) 의병장》 기록의 〈강진원의 생애와 활동〉〈강씨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강희열(姜希悅)의 후손〉이라는 기록에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잘못이다.

우선 두 사람은 같은 晋州姜氏로 고구려 제26대 영양왕대 병마도원수(560~642) 姜以式 장군의 후손이지만 서로 中始祖가 다르다. 강희열(姜希悅)은 고려 8대 현종때 거란 침략을 물리친 병마원수 姜民瞻 장군(963~1021)의 14세 손으로 殷烈公(民瞻)派이고, 강진원(姜振遠)은 1274년 고려 24대 원종때 국자감박사 姜啓庸의 26세손으로 博士公(啓庸)派이다. 너무나 부실한 학술강연 발표자료에 심히 유감으로 보며 이런 잘못은 하루 빨리 바로 잡아야하겠다.

● 성산(聖山) 강진원(姜振遠)장군과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선생의 가계(家系)

 1. 의병장 성산(聖山) 강진원(姜振遠)장군 가계(家系)

국가 보훈처에 의해 “2006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된 “의병장 성산 강진원(姜振遠)장군(1878~1921년)”은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 선생의 집안 從叔父(堂叔)가되는 사람이 강진원 의병장이다.

성산(聖山) 강진원(姜振遠)의 가계(家系) 박사공파(博士公派)로 박사공의 5세 군보(君寶)→6세 시(蓍)→7세 통정공 회백(淮伯)→8세 대민공 석덕(碩德)→9세 문량공 희맹(希孟)→10세 사평공 학손→11세 기수→12세 사진(思晋)→13세 지성→14세 장인→15세 맹(孟)→16세 한우→17세 계남→18세 일원→19세 인걸(仁傑)→20세 진환→21세 재인→22세 운회→23세 영필, 영칠→24세 영필의 子 민수․ 중수, 영칠의 子 일수(日秀)→25세 중수의 자 대일, 日秀의 子 大有, 대룡(大龍 : 字 仁瑞)→26세 대일의 子 希遠, 大有의 子 忠遠(生父 大龍), 大龍 子 忠遠(大有의 養子), 孝遠, 진원(振遠 : 初諱 亨遠, 字 亨佑)→27세 振遠의 子 성철(生父 希遠)→ 28세 호구(字 敏鎬)→29세 병필(字 운필)로 이어지고 있다.

2.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선생 가계(家系)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선생의 家系는 박사공파(博士公派)로 박사공의 5세 군보(君寶)→6세 시(蓍)→7세 회백(淮伯)→8세 대민공 석덕(碩德)→9세 문량공 희맹(希孟)→10세 사평공 학손→11세 기수→12세 사진(思晋)→13세 지성→14세 장인→15세 맹孟→16세 한우→17세 계남→18세 일원→19세 인걸(仁傑)→20세 진환→21세 재인→22세 운회→23세 영칠→24세 일수(日秀)→25세 대유(大有)→26세 충원(忠遠 : 生父 大龍)→27세 忠遠 子聲善(吉元), 聲昊(桂重),聲順(吉淳), 聲台(吉泰), 聲滿(佶滿) / 27세 5兄弟중 둘째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이시다.

3. 강진원(姜振遠)장군과 강계중(姜桂重)선생의 가계(家系) 聯關圖

24세 영필의 子 민수․ 중수, 영칠의 子 일수(日秀)→25세 중수의 자 대일, 日秀의 子 大有, 대룡(大龍 : 字 仁瑞) →26세 대일의 子 希遠, 大有 子 忠遠(生父 大龍), 大龍 子 忠遠(養父 大有), 孝遠(字 경팔), 振遠- 27세 希遠의 성수․聲哲, 忠遠 子聲善(吉元), 聲昊(桂重),聲順(吉淳), 聲台(吉泰), 聲滿(佶滿) / 振遠 子聲哲( 初諱 宇哲 : 生父 希遠)

● 兄弟義兵將 강희보(姜希輔) 강희열(姜希悅)의 家系

형제의병장 강희보 강희열의 家系는 은열공파(殷烈公派)로 1세 민첨(民瞻), 2세 단(旦), 3세 보(輔), 4세 정협(貞叶), 5세 여익(呂翼), 6세 원찬(元鑽), 7세 윤지(允祉), 8세 수(壽), 9세 일우(壹遇), 10세 자위(自渭), 11세 문한(文翰), 12세 근, 13세 천상(天祥), 14세 희보(希輔)·희열(希悅)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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