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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원칼럼】조국을 사랑한 오오사카의 큰별 호산 강계중 선생과 추모 동상
  • 강진원 기자
  • 승인 2016.02.2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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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순천시 조곡동 295-5에 가면 대한민국 생태수도 순천의 관광명소 죽도봉(竹島峰) 공원이 있다. 공원 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조선 중기 목민관 백우비와 백우탑」,일제시대와 광복후 재일거류민단의 권익신장에 일생을 바쳐온 「오오사카 재일거류민단장을 엮임했던 강계중 선생 동상」이 있다.

그런데 정작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 : 1914년 음력 8월 15일~1983년 양력 8월 21일, 향년 70세) 선생이 일제 강점기 항일투사이며 광복 후 한일국교가 수립되지 않는 일본에서 재일거류민단을 이끌며 재일거류민권익신장에 앞장서고, 1960년 1인당 국민소득 80달러에 불과한 낙후된 한국농업의 발전을 위해 일본에 한국 농업 연수생을 보내 농업 교육을 하고, 일본에서 제주 밀감 묘목 60만주를 보내 오늘날 한국 밀감산업발전에 초석을 다진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선생은 한국 6대 거성(巨姓) 진주강씨(晋州姜氏)로 조선 세종(世宗)~성종(成宗) 뛰어난 문장가·산수화가․정2품 兵曹 吏曹 判書·종1품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姜希孟(1424~1483)의 19세손으로 명문의 자손으로 1914년 음력 8월 15일 순천시 황전면 수평리에서 선친 강충원(姜忠遠)의 아들 5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키워온 애국심

국가 보훈처에 의해 “2006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된 “의병장 성산 강진원(姜振遠)장군(1881~1924년)”은 강계중 선생의 집안 당숙뻘되는 강진원 의병장은 한일합방이 되자 전라도 일대에서 800여명이 넘는 의병을 모아 전라도와 경남 하동, 남해 등지에 왜병과 수십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는데, 강계중 선생이 10살 때 순천의 헌병대에 잡혀 모진 고문 끝에 혀를 깨물고 자결하였다. 이 사건은 소년 강계중의 뇌리 속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강진원 의병장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깊이 자리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일제시대 항일 활동

집안이 가난하여 1940년 함경북도 성진(城津) 고주파 군수제철공장에서 일하면서 한국인 노무자 3천여명 이끌고  일본인들의 가혹한 박해와 인권침해에 항거한 훗날 고주파 민족투쟁이라 일컬어진 파업 투쟁을 이끌었고, 1944년 죽음의 길이라는 남방행 징용 열차에 실려가는 동포들을 구출하기 위해 스스로 징용열차에 동승하여 신도쿠역 부근에서 33명의 징용 동포를 구출한다.
1945년 불우한 동포인 여성들을 자유의 몸이 되도록 도왔으며 귀국동포를 실은 우키시마마루(浮島丸)호 침몰사건을 계기로 국제노동동맹을 활성화하여 동포들의 참식과 안전한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다.

광복후 재일교포 권익신장위해 노력

조국 광복후  계속 일본에 거주 하면서 재일교포의 단결을 위해 1946년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오오사카(大阪)를 중심으로 9개의 지방조직을 결성하여 동포들의 힘을 키우는데 전력하였다.
1959년 북송반대를 위한 재일동포 총궐기대회를 주도하였고, 1961년 대한반공순국단을 결성하여 단장에 선임된 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일본 사회당․공명당․기타 단체를 규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63년 이래 재일거류민단 오오사카 단장 4회, 중앙본부 상임고문 등을 엮임하면서 민단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964년 긴키지구협의회 사무국장으로 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 요구 실천 민중대회를 주도하였고, 1964년 재일 동포학생의 모국방문단(370명)을 인솔하였다.
1965년 2세 동포들의 민족교육을 위해 자비로 한국어학본 1만부를 출판하여 동포들을 교육하였다.
1973년 재일동포들에게 본성명 사용 및 이름표 달기 운동을 전개하여 민족의 민족의 자긍심을 높혔다. 또한 주일 오사카 총영사관 청사건립에 헌신하였다.

조국사랑 애국 애향의 발자취

1965년 1차 순천지역 16명, 1966년 2차 전국 농업연수생 61명을 초청하여 일본의 선진 영농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이 중 제주도 출신 농업연수생 3명(김기평외 2명)을  제주도 기후와 토양이 유사한 와카야마(和歌山)현에 파견시켜 6개월간 밀감재배 기술을 교육받게 하였으며 귀국시 묘목 100그루를 기증 시험 재배토록 한 바 성공하였다.

 그런데 1970년 60만 주 묘목을 보낼 때는 뉴아리랑호라는 한국 화물선에 묘목을 실어놓고 일본에서 출항허가를 안해주는데 이는 일본정부의 장차 밀감 수출에 장애가 된다며 일어난 일로 선생이 당시 동경 경시청에 근무한 적이 있는 조종대씨를 내세워 농림성, 통산성, 법무성 등을 두루 접촉하게 하여 결국 3~4일만에 허가출항허가를 받아 배에 실린 묘목들이 뿌리가 말라버리기 전에 우리나라 제주도로 무사히 운송하여 기증 재배하여 제주도 밀감산업의 초석을 만들었다.

제주도가 한 때 전국 제일의 소득을 올리는 지역으로 성장한 한라의 기적-감귤사업의 이면에는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던 것인데 선생의 기념관 건립 조차 안되는 아쉬움이 남는다.

농어촌에는 전기조차 없었던 1969년 순천시 황전면, 월등면 800여 세대에 전기공급공사를 해주었고, 순천경찰서 건축기금을 지원하였다.

1970년 광일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인재 육성에 공헌하였고, 낙후된 전라남도의 현실을 보고 전남출신 재일동포들과 힘을 합쳐 김재식 전남지사에게 농약공중살포용 헬리콥터 1대, 전남 경찰국 대공경비용 헬리콥터 1대를 기증하였고, 순천시내 초등학교 4개교와 중학교 5개교, 고등학교 2개교에 부지대금 및 교재․교구 구입비를 지원하였다.

1971년 순천시 가두 노동자와 미화요원, 행상인들에게 방한복 1000여벌을 기증하였고, 재일본 전남도민회를 결성하여 초대회장에 선임된 후 5차에 걸쳐 재일본 전남도민회 모국방문단을 인솔하였으며, 이때 수재의연금 1067만엔과 완도해양경비정 구입비 2000만원을 전라남도에 기탁하였다.

1972년 순천시 황전면 수평대교 건설비를 지원해주었고, 순천시 통합전 구)승주군 새마을 자연부락 458개 마을에 라디오 각1대씩 458대를 기증하여 농어촌 지역 공영방송 라디오 청취의 혜택을 주었고, 당시 경찰 기동운행장비가 너무나 부족한 현실을 보고 경찰청 전신인 내무부 치안국 특별기동대에  경찰 오토바이 1200대를 기증하였는데 그 중 100대는 선생 자부담으로 기증하였다.

1979년 MBC방송국에서 󰡒대판(大阪)의 별 강계중󰡓60회 연속 방송되었고, 남도예술회관 건립 기금과 순천체육회 발전을 위해 5500만원을 희사했다.

1983년 독립기념관 건립시 2200만원을 헌납하였고, 남도 장학기금으로 3000만원을 전라남도에 헌납하였다.

1983년 양력 8월21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고, 재일 거류민단 오오사카 지방본부의 주최로 제1회 10주년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1999년 11월 27일 선생의 공적을 추모한 순천시(시장 申濬植), 순천시의회(의장 朴相昊)에서 선생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동상은 3월부터 시민과 유족들이 모은 성금 2억 900만원을 들여 청동으로 제작한 5.7m(동상 3m, 좌대 2m) 높이의 입상이다.

진주시 봉산사(鳳山祠) 건립기금 쾌척
1975년 9월 11일 진주시 상봉서동에 위치한 진주강씨 시조 사당인 봉산사(鳳山祠) 건립에 총공사비의 3분의 2에 달하는 일본화폐 3억엔을 쾌척하고, 경향 각지 뿐만 아니라 일본 거주 종친들까지 뜻을 모아 쇠락(衰落)해가는 봉산사를 1983년 12월 20일 준공하였다. 호산 강계중 선생은 이런 거금을 쾌척하시고도 1983년 양력 8월 21일 별세 하시어 봉산사 준공을 보지 못하셨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받아

선생은 1971년 4월 19일 재일 한국인의 영주권 신청 촉진 헌신과 복지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 수상,  1974년 4월 11일 우리나라 사회 발전과 국민복지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가 민간에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강계중 선생의 형제로 지역사회 발전에 연고가 있는 사람은 둘째 동생으로 몇년전  별세한 청암대 강길태 학장과 막내 동생은 공화당 시절 무소속 국회의원을 지낸 강길만(姜佶滿)씨가 있다.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 선생의 家系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 선생의 家系는 박사공파(博士公派)로 박사공의 5세 군보(君寶)-6세 시(蓍)-7세 회백(淮伯)-8세 석덕(碩德)-9세 희맹(希孟)-12세 사진(思晋)-19세 인걸(仁傑)-24세 일수(日秀)-25세 대유(大有)-26세 충원(忠遠)-27세 5兄弟중 둘째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이시다.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 선생에 관한 기록의 문의
호산(湖山) 강계중(姜桂重) 선생에 관한 기록의 문의는  私財를 들여 『湖山 姜桂重 傳記, P525』 제3판(1999.11.25. 圖書出版 藝苑)을 편집 발행하신 선웅건설(善雄建設) 강태수(姜太秀) 會長(모바일폰 010-3611-0978)님‘과 이데이뉴스>뉴스홈> 칼럼> 데스크갈럼>2016.01.25 > 강진원기자 >  [강진원칼럼] 조국을 사랑한 호산 강계중 선생과 추모 동상 > 이데이뉴스 기사원문보기>
http://edaynews.com/detail.php?number=19493&thread=33r02
네이버 진주강씨광주전남종회이사 휴정 강진원 블로그 칼럼난 > http://blog.naver.com/kjw5310k/220607541550 에 기고해 언론 및 인터넷 홍보에 앞장서주신 전남 순천시종회 강진원 현종(모바일폰 010-3628-4517)에게 문의 하시기 바란다.


 ※ 봉산사(鳳山祠)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모시는 사당.
강이식(姜以式 : 560~642) 장군은 진주강씨의 시조로, 고구려 영양왕 9년(598) 임유관(臨渝關) 전투에서 수나라 대군 30만명, 612년(영양왕 23)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대군 113만 3,800명을 섬멸시킨 명장이다. 이때 강이식 장군이 요동 오열흘성 전쟁에서 수양제 친정군  11군단 72만 6천 1백명,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청천강)에서 수나라 우문술 우문중 별동군 9군단 30만 7천 7백명(30만 5천명 사망, 2700명 생존 도주), 건무장군(후일 영류왕)이 패강전쟁(대동강)에서 내호아의 수군 4군단 10만명을 물리친 전쟁이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광종은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 장군의 구국충절을 기려 950년 봉산사를 건립하고, 매년 한식날에 제사를 모시게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570년(선조 3)에 사당을 중건하고 재호를 봉강이라 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716년(숙종 42)에 사당을 중건하였고, 1975년 9월 11일부터 1983년 12월 20일 까지 다시 현재의 봉산사 사당으로 건립하였다. 경내에는 사당 건물인 봉산사와 강이식장군사적비, 중문인 대의문(大義門)과 정문인 봉산문(鳳山門) 등이 있다.

▲ 전 진주강씨 중앙종회장 姜太秀     ©편집국

숨은 이야기---강태수(전 중앙종회장) 

제주도의 밀감보급은 누가 했는가 ? 
일본에서 건너온 조생종(신품종) 밀감나무에서 따낸 밀감은 날개를 달아 대한민국 방방곡곡으로 팔려 나갔다.
밀감 나무는 수입이 높아 한그루로 대학생을 가르친다 하여 대학생 나무가 되었고, 1980년 제주도의 소득은 대한민국 순위 一位를 차지했다.
그런데, 제주도의 밀감나무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아났는지 귀신도 모르고 道廳(도청)이나 기타 연관기관에서도 전여 알 길이 없는 체 이토록 큰 의미를 갖는 역사적인 사실이 미궁에 빠져있었다.
佶泰 學長께서 학생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 중 밀감농장을 방문했다. 관광안내원으로부터 밀감 보급에 대한 설명이 사실과 다를 뿐만 아니라 보급자가 황당하게도 지옥에서 수입한 人物이 등장함을 듣고 누구보다도 밀감보급에 관심과 精力(정력)을 쏟았던 학장께서는 귀신에게 홀린 듯 한 심경 이였다고 하신다.

곧, 밀감 보급 당시 호산 선생과 함께 일한 제주출신 洪性一, 洪正一 氏와 왜곡된 기록을 바로 잡도록 협의 하였다.

순천 청암 대학 吉泰 學長은 湖山과 형님, 동생이기 전에 學者로서 대단한 역사적인 寄與(기여)가 水面(수면) 아래로 사라진데 대해서 淵源(연원)을 찾기로 결심 하셨다.
佶泰 學長님은 사실규명을 위해 日本 오사카로 장소를 옮긴다.
거류민단 단장 강계중 先生은 조국의 부강만이 천대와 차별 속에 생활하는 제일동포의 슬픔을 잊게 하고 당당한 외국인으로 생활 할 수 있다는 신념과 대한민국의 살길은 조국이 선진농업 기술도입만이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하시고 그 뜻을 실천에 옮기셨다.
1차로 16명을 선발하여 모든 경비를 지불하시고 오사카 농업 센터에서 연수를 시켜 비닐하우스 등 다방면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2차로 정부에 건의하여 추천받은 농촌의 청년 61명을 경비 일체를 선생이 부담하시고 日本 전역에 유명 농업 센터에서 선진 농업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61명의 연수생 중 제주 출신 김기평, 김순평, 이명상 3명은 제주도 기후와 비슷한 日本의 유명한 와카야마(和歌山)현에 보내 밀감 재배 방법을 연수받게 했다. 그리고 이들이 귀국할 때 조생종 밀감 묘목 1백 그루를 선물로 줘서 키워보게 하였다.
신품종 묘목이 입식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先生은 佶泰 學長과 밀감 묘목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70년 묘목(밀감) 60만 그루가 모아지면서 그 소식을 들은 일본정부의 농림성과 통산성의 반대가 극심했다.
이유는 향후 밀감 수출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 그 반대의 이유였다.
그러나 先生은 끈질긴 노력으로 일본정부의 반출 허가를 받아냈다.
60만 그루의 묘목(밀감)은 제주출신 단체와 교포 그리고 그 중심에 선 강계중 단장의 노력의 결실로 화물선 뉴 아리랑 호를 타고 제주도에 반입되었다.
당시 뉴 아리랑 호를 배웅하는 단장일행과 교포들은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는 증언도 많았다.

눈을 감고 그 눈물의 뜻을 음미해 보면 일제의 핍박과 제일교포라는 운명적 비운이 혼재한 피눈물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모금활동의 정성으로 제주도 땅에 들어온 밀감나무는 강계중 선생과 묘목보내기 운동에 참여한 교포들의 간절한 소망과 농민들의 피와 땀을 먹고 성장하였다.
湖山선생의 實弟 吉泰(청암대학)학장께서는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정리하고 김진욱씨에게 지시하여 제주도 출신 김기평 외 2명이 행방을 추적하였다.
한분은 돌아가시고, 한분은 고향을 떠나시고, 그런 사유로 오사카 중심의 농업 연수원과 와카야마(花歌山)현 연수원을 방문 중 수소문 끝에 일본에 거주하시는 한분을 찾을 수 있었다.
1967년의 추적을 마무리 하던 중 崔在三(경찰대학)교수 역시 제주도 밀감 역사를 더듬어 日本대판의 거류민단을 방문하는 등 자료를 수집하는 가운데 두 분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두 분의 노력으로 밀감나무의 역사가 정리되어 제주대학에 강계중 선생의 공적비 건립이 태동되었으며, 계중선생의 태생지인 順天시립공원(죽도봉)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금년 靑壯年 體育大會(청장년 체육대회)에 참가한 제주도 출신들이 선조님들을 참배코자 찾아간 順天 죽도봉에 세워진 湖山 先生의 동상에 기록된 밀감나무의 연혁을 보고 감명과 놀라움이 겹쳤다.

2차 대전 초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영국의 사무엘 스마일즈는 자신의 저서에 神佑自助者를 주장하였다. 그 뜻은 국가나 가정이나 개인도 자기 스스로 끝없이 노력해야 만이 하늘이 돕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무장으로 중국에 망명한 임시정부의 巨人(거인) 金九(김구) 先生이 계신다면 일본에서는 제일 동포들을 위해 헌신한 작은 거인 湖山 姜桂重 先生이 있었다고 할 것이다.

한 사람이 뜻을 세우고 그 능력에 의해 제주도 땅에 큰 빛으로 밝게 비친 湖山 先生의 업적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우리나라의 밀감의 始源(시원)이 어디인지를 기억하고 내내 그 유덕에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죽도봉공원(竹島峰 公園)

위치 : 순천시 조곡동 295-5
문의안내 : 순천시청 관광진흥과 061-749-6331
출처 : 순천시청 홈페이지>생태수도 관광명소>아름다운 11경> 죽도봉공원
정보제공 : 대한민국 구석구석

전남 순천 죽도봉 공원은 순천 시가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어서 순천 시민들의 산책과 휴식처이며, 녹음이 우거진 동산은 흡사 외롭게 둥둥 떠 있는 섬같이 생겼다. 이 곳은 약 4백년 전만 하더라도 전죽(箭竹=화살대)밭으로 전해져 왔고, 그의 생김새가 마치 섬(島)과도 같아 죽도(竹島)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전죽을 많이 소산(所産)해서 전쟁병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75년부터 순천시가 죽도봉 개발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인 환경미화조성사업을 벌여 공원화 작업을 서둘러 왔다. 죽도봉 정상에 오르면, 당시 순천시가 건립한 전망대와 여순사건과 6.25때 순국한 이고장 출신들의 반공순국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모두 철거시키고 이 자리에 「강남정(江南亭) 1981년 10월 15일 건립된 3층 8각정」이라는 정자를 건립하여 전망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 강남정은 재일교포 김계선님이 1981년 약 8천만 원을 순천시에 기탁하여 같은 해 10월 15일 제14회 순천시민의 날을 맞아 제막했다. 이 밖에도 김계선님의 독지로 1975년 2월 건립된 「팔마탑」과 1978년 8월 건립한 「연자루」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연자루 바로 앞에는 용두샘(飮水臺)이 있어,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의 목을 적셔주기도 한다. 우리 고장 인재 양성에 헌신한 「우석 김종익」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자 하여, 1995년 5월 12일 우석 김종익기념사업회가 세운 「우석김종익선생동상」과「현충탑」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석 동상 옆 산책로를 따라 가면 봉화산(355m) 정상으로 향하게 된다.

현충탑(顯忠塔)은 1948년 여순사건 때와 1950년 6.25 때 국토방위와 자유를 위해 피로 충성을 피운 국군, 경찰관, 애국청년단원, 그리고 용감한 반공순국 시민들의 넋을 죽도봉 정상에 있었던 반공순국위령탑과 경찰서 충혼비, 향림사 충혼비 등에서 옮겨와 1979년 5월 30일 합동으로 모시고 있다. 또, 공원 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백우비와 백우탑」,「강계중 선생 동상」이 있고 활터로 사용하고 있는「환선정」이 있다. 죽도봉 공원은 봄철엔 벚꽃과 철쭉꽃이 활짝 피어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이다. 시민들이 가족과 함께 가끔 찾는 곳이다.

강진원 기자  kjw5310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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