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장흥학당에서 장흥군 유지들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장흥군 발전과 한중교류’란 주제로 강의를 하였다. 1999년 10월 16일 세미나에서 ‘장흥군 문화관광산업의 활성화 방안’이란 주제로 발표할 때 장흥군에 ‘정남진(正南津)’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지금은 정남진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오고 있다. 장흥군은 앞에 수식어가 하나 생겨 장흥군을 알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장흥군에 중국 절강성 해염현과 장흥현을 소개하여 자매결연도 맺도록 해주었다. 해염현의 경우 남북호 바로 옆에 재청별서가 있는데 이곳에서 김구(金九)선생이 6개월간 피난한 곳이기도 하다. 윤봉길의사에게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하고 난 후 가흥으로 피난을 왔지만 위험하여 해염현으로 피난하였다. 김구선생이 상해(上海)로 가기 전에 장흥 사인정(舍人亭)에서 하룻밤을 자고 제일강산(第一江山)이란 글씨를 남기고 간 적이 있기 때문에 인연이 있다. 

절강성 장흥현은 당나라시대 다성(茶聖)으로 유명한 육우(陸羽)선생이 차를 재배하고 연구한 곳이다. 장흥현에서 만들어지는 떡차인 병차(餠茶)가 유명하고, 장흥군은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떡차인 청태전(靑苔錢)이 유명한 곳이다. 장흥현은 바다 같은 호수가 있지만, 장흥군은 호수 같은 바다가 있는 곳으로 인연이 있으며, 장흥은 ‘자흥’으로 발음내고, 중국은 ‘창싱’인데 ‘차싱’으로 발음내고 있으며, 산세가 상호 비슷하다.

  장흥임씨는 절강성 소흥(紹興)에서 들어왔다. 소흥은 월나라 수도로 오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효빈(效顰)의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대문학가 노신(魯迅)선생과 중국 4대 미녀인 서시(西施)의 고향이기도 하며, 서예가 왕희지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난정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부춘정은 광주전남 8대정자로 유명하며, 절강성 부춘강은 한나라시대 엄자릉의 조대(釣臺)가 유명하고, 원나라시대 화가 대치(大痴) 황공망의 부춘산거도로 유명하다. 추사 김정희선생은 제자 허련에게 황공망의 그림과 같다하여 소치(小痴)로 호를 바꾸게 하였다. 부춘산거도는 가로 637cm 세로 33cm로 절반은 대만 고궁박물관에 있고, 절반은 중국에 있다. 중국인들은 부춘산거도가 합치는 날 통일이 될거라고 말한다.

  장흥위씨는 하남성 홍농(弘農)에서 왔으며, 춘추전국시대 맹상군(孟嘗君)의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함곡관(函谷關)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노자(老子)가 도덕경(道德經)을 지은 곳이다.

  중국 전국시대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맹상군의 집에는 무려 3000여 명의 식객이 있었다. 식객이란 남의 집에 얹혀 밥이나 축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식객으로 있던 사람들의 면면이 더 놀랍다. 글 읽는 선비도 있었지만 문서 사기범, 도둑, 그리고 동물 소리를 흉내 내는 등 천한 기예를 자랑하는 이들도 있었다. 맹상군이 그런 이들을 식객으로 거느린다는 것 자체가 의아할 정도였다.

  제(齊)나라의 맹상군은 갖가지 재주 있는 식객이 많았다. 어느 날 진(秦)나라 소왕(昭王)의 부름을 받아 호백구(狐白裘)를 선물했다. 소왕은 맹상군을 임명하려 했지만 많은 신하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한편 맹상군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음모를 알아차리고 소왕의 애첩 총희(寵嬉)를 달래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하니 호백구를 요구하였다.

  개 흉내로 도둑질에 능한 사람이 "신 이 능히 호백구를 얻어 오겠습니다." 하고 밤에 개 흉내를 내어 진나라 궁의 창고로 들어가서, 바쳤던 호백구를 취해서 그녀에게 주니 그녀의 간청으로 석방되었다.

  그 곳을 빠져 나와 밤중에 함곡관에 이르니 닭이 울어야 객을 내보낸다는 관법으로 객 중에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자가 '꼬끼오' 하니 모든 닭이 따라 울어 관문이 열렸고 무사히 통과하여 제나라로 올 수 있었다. 나중에 소왕은 맹상군의 귀국을 허락한 것을 뉘우치고 병사들로 하여금 뒤쫓게 했으나, 이미 관문을 통과한 뒤였다. 

 장흥읍 평화리(平化里) 입구에 노자가 가장 좋아하는 글인 상선약수(上善若水)비는 고영천선생에 의해 세워졌다. ‘平化’란 글이 도교적인 글이며, 평화리 내에 고영완선생의 고택이 있다.

  고영완선생은 일제시대 항일운동, 학생운동 등을 하여 함흥형무소에서 형을 살다 나왔으며, 일제시대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였고 해방 후에서 반공활동을 하여, 군수와 국회의원을 2번이나 했으며, 일제시대 독립자금으로 당시 40만원를 기부했으며, 그의 집에 상선약수샘이 있다.

  이 마을 고영천선생의 4촌 누나인 소고당 고단 여사께서 ‘친정길’이란 규방가사를 지었다. 결혼한 여자들에게 가장 좋은 말은 친정이며, 친정에 가는 길인 ‘친정길’이 가장 걸어가기 좋은 길이다. 그래서 이번 강의를 통해 그곳을 ‘친정길’로 제안하였다. 길 양 옆으로 아름다운 나무와 꽃을 심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길로 만들었으면 한다. 장흥군에 가보면 ‘어머니 품 같은 장흥’이란 글이 많이 보인다. 바로 친정길이 어머니 품 같다. 

 

                                                              강원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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