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조 대표(사실과 과학)

1. 공무원으로 혼자 가는 길을 가다

다른 분들은 새로이 직책을 맡으면 규정집부터 챙겼다.

나는 새 사무실, 새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한 컨에 비치된 여러 업무처리 기준 규정집을 치워버렸다.

어린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을 40년이나 한 아버지는 나의 생활에 일체 관여도 충고도 않으셨다. 한 가지만 가르쳐 주셨다.

“어느 자리에 있든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부터 하여라.

나보다는 우리, 오늘보다는 내일이 중요하단다.

그것이 공직자의 기본자세다."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공직자의 길은 참으로 외로운 것이다. 나 혼자 바르게살기도 힘든 것이 인생인데, 세상을 걱정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느냐?”

그리고 잘 드시지도 않던 소주를 한 잔 따라 주셨다.

80년 가을 아버님은 장성 남면 교장 선생을 하시다가, 전두환 정군이 들어선 이후 장학사의 “장성군내 어느 한 분의 교장 선생은 사표를 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밤 새 한 잠을 못 이루시더니 새벽 일찍 완행버스를 타고 학교에 나가 사표를 쓰고 오셨다.

정권이 바뀌면 그 때마다 ‘공무원 肅正’을 한다.

숙정을 해야 한다는 서슬 퍼런 방침만 있을 뿐 숙정의 기준도 없다. 상부에서는 사람숫자만 할당을 하여 지시만 내리고 독촉만 할 뿐 어떤 사람이 해당되는 지 방침도 없다.

진짜로 부정부패를 할 줄 아는 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516 혁명 뒤에는 유일한 잣대가 ‘蓄妾’ 이었다.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도 미웠고, 장학사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할 정도면 교장 한 사람 누군가는 그만 두어야 한 상황이라고 본 듯하다.

어느 교장선생 하나 그만 둘 수 없는 상황을 뻔히 아는 데, 자신이 그만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을 내린 듯하다.

세상 사람들은 아버지를 ‘君子’의 전형으로 본 듯하다.

나는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돈 키호테’나 ‘도깨비’로 보이는 듯하다. 그들은 나의 1할의 실체도 모른다. 관심도 없다. 세상은 나에게 소주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내 아버님은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했고 부끄러운 일은 자존감이 워낙 강해 단 한 번도 못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하게 고집은 셌다.

다른 분들은 아버님을 ‘군자’라 불렀지만, 우리 어머님을 아버지를 ‘원수’로 불렀다.

나도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동생은 고교졸업반이었다.

그 시절에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 해보았자, 쌀이랑 식량은 시골에서 다 가져오고 문전옥답까지 파는 데도 자식들 대학보내기가 버거웠다.

아들 욕심이 남다른 어머니는, 딸들은 서울로 대학진학을 못하도록 하고 남동생들을 위해 2년제 교육대학에 가도록 정신교육을 단단히 시켰다.

큰 형은 그런 집안 형편을 감안 광주일고 나온 사람들은 인생 실패한 것처럼 여기는 지방의 전남대학교로 갔다.

전두환은 못한 것도 많지만 잘 한 것도 많다.

성격이 비교적 담백하다. 의리가 있다. 부하들 챙길 줄도 안다.

공무원 부정비리 보고를 받고는, 당장 국가예산 사정에 관계없이 공무원 월급을 올려라! 먹고는 살게 해주고 그래도 돈을 처먹는 이들은 과감하게 자르라고 지시를 내렸다.

공무원 보수를 현실에 맞게 과단성 있게 월급을 올려준 정책결정권자는 전두환 대통령이 유일하다.

어머님은 이제 월급도 좀 올라 애들 교육은 시킬 수 있겠다고 기쁨에 들 떠 있었는데, 아버지는 청천벽력처럼 사표를 쓰고 오셨다.

‘웬수, 웬수’를 외치며 어머님은 이틀을 누워 계셨다.

어머님이 잊을라치면 옆 동네 사시는 아버지 친구 되는 정교장 선생님 사모님, 지금 전남대 화순 병원장을 지내고 있는 정신 박사 어머님이 놀러 오셔서 어머니 가슴에 맺힌 화를 돋구었다.

“전 두환이가 대통령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우리 공무원들은 먹게 살게 해줍디다. 이번 달에도 보너스도 주고 교장 수당까지 탄께 돈이 솔 찬이 됩디다. 인자 교장도 해묵고 살만 해라.”

어머니는 그 말을 들으면 속이 섞어 문드러졌다고 한다.

아버지는 ‘웬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일제의 식민지 탄압보다 더 심한 어머니의 구박 속에서, 오 만 원 짜리 한 장 못써보고 어머니 눈치만 보고 살다가 가셨다.

어머니 압제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아버님은 당최 말을 안 하셨다.

가끔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누군가 교장 한 사람은 그만 두어야 하는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왜 그 사람이 당신이 되어야 하냐고” 어머니는 아버지 말이 한마디도 못나오게 다그쳤다.

“왠수, 어디 가서 돈 한 푼 쌀 한말 못 빌려오는 재주 없는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하냐고, 그 서푼어치도 안 되는 자존심 때문에 그랬지. 누가 모를 줄 알고”

나는 얼마 전에 나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는 말과 똑같은 말을 내 아내에게 듣고 깜짝 놀랐다.

“어디 가서 돈 백 만원도 못 벌어오는 사람이 탈 원전 반대 그런 실속 없는 일은 왜 하고 다니냐고? 돈이 나와 밥이 나와.”

2. 사나이 가슴에 불을 지른 최승희와 그의 딸 안성희

나는 울 아버지가 말씀이 하도 없어 말 주변이 없는 줄 알았다. 한번은 대학생 시절인 83년도에, 아버지의 광주서중 동창생인 희곡작가 차범석 선생이 놀러오셨다.

어머니께 술상을 보라하시더니, 꼽추 춤을 추며 난리 부루스를 췄다.

그러다가 몇 달 후에는 무용가 최승희를 연구하던 정병호 선생님이 오셨다. 차범석 극작가, 나의 동창생 친구인 성악가 임해철의 아버님 임선호 피부과 원장님 네 분이 광주극장에서 무용수 최승희가 나오는 영화를 봤던 이야기를 하시며 공옥진 춤을 또 추셨다.

무용가 최승희를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는 지, 지금도 나의 뇌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최승희로 각인되어 있다.

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와 ‘부용산’의 작곡가인 나주 남평 출신의 안성현 선생님 이야기도 하셨다.

안성현 선생의 부친인 안 기옥 선생은 우리나라 해금연주의 일인자였다고 한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망치게 한 주범인 것은 확실하지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 대 에 걸쳐 내려오는 독특한 특성 중의 하나는 세 사람이 예술, 특히 음악을 좋아하는 점이다.

그래서 고르고 고른 뚱땡이 김정은의 여자가 예술단 출신 이설주다.

나는 얼마나 엉뚱한 친구인가 하면, 작년 여름 섬진강 강변에서 지리산 섬진강 세계 평화음악제를 열고 싶어 미칠 뻔 했다.

존 바이츠에게 편지를 네 번이나 썼다.

하이라이트로 김정숙 여사와 이설주를 마지막 피날레 무대에 세우려고 코피를 흘리며 연구했다.

세상의 도전과 모험이라고는 모르는 착실 과장 김영록 전남도 지사의 완벽 블로킹에 막혀, 나의 꿈은 또 다시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북한의 철부지 그들은 남한에서는 단골래라고 문간채에서만 밥을 먹게 하던 판소리나 창하는 분들을 재주를 타고 난 분들로 매우 귀히 여겨 대접했다.

훗날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북으로 간 것도 김 씨 왕조 가문의 예술사랑 기질 때문이다.

이응노 화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승희의 딸의 이름은 안성희다.

최승희는 1930년대부터 전 세계 공연을 다니고 헤밍웨이, 장 콕토, 게리 쿠퍼, 채플린, 피카소, 로버트 테일러 등은 물론 나중에는 중국의 주은래 까지 전 세계에서 한가락 씩 하는, 예술을 아는 멋진 신광조 같은 사나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분 여인이다.

김일성과는 아주 친숙한 사이였고, 숙청에 얽힌 사연도 많지만 남녀 연인 관계는 아니다.

우리나라 한류 물줄기인 BTS 의 단연 원조는 최승희다.

1930년대 이미 월드 스타였고, 할리우드 영화 가에서도 최승희를 잡으려고 안달이었다.

어머니는 청주를 내고 술상을 차리기에 바빴고, 정병호·차범석 임선호· 그리고 나의 아버지 네 분은 6·25 무렵을 전후한 예술 이야기에 밤은 깊어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의 술자리에서 최고로 인기 없는 이야기는 월남전 등 군대 이야기고

가장 집중도가 높은 이야기는 첫 사랑과 숨겨진 사랑이야기다.

그 때 안들은 척 하면서 술이 떨어지면 얼른 주전자를 들고 안방에 드나들면서 네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최승희는 1911년생이니, 1923, 24년생인 네 분들에게는 10여년 연상의 여인이라 멀리서 우러러만 봤을 뿐 다가설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최승희의 남편은 오빠 최승일의 친구였던 안 막이라는 문학인이었는데, 나중에 안 막은 자신의 예술의 길은 접고 최승희의 매니저 역할을 주로 한다.

두사람 사이에 태어난 첫 딸이 안성희라는 무용가이다.

안 성희는 1932년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최승희에게 무용을 배웠고 어머니와 함께 무대에 서며 무용가로 활동하다가 1953년엔 소련 모스크바의 볼 쇼이 발레학교로 발레유학을 갔다.

유학생활 도중 1956년 모스크바 국제무용 콩꾸르에서 ‘집시춤’으로 1등상을 수상하였다. 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 귀국공연에는 김일성이 관람하였고, 공연 후에는 직접 꽃다발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귀국 후 국립무용극원 원장을 31세에 맡았다.

최승희와 그의 딸 안성희의 삶은 예술에 관심이 많은 영화인에게는 한번 메가폰을 꼭 잡고 싶은 큰 소재이다.

TBC가 한 번 제작했고 MBC 에서도 1995년 광복절 기념으로 2부작 드라마로 방영했다. 채시라가 최승희 역을 이주영이 안성희 역을 맡았다.

이 드라마는 북한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고 한다. TBC제작 작품은 너무 많이 왜곡되었고, MBC 제작분은 비교적 사실에 충실하다는 것이 북한 사람들의 평이었다.

2000년대 들어 극단 미추에서도 최승희의 삶을 뮤지컬로 제작했다. 연출자 손진책의 부인 진도출신 김성녀가 무려 8kg을 감량하고 최승희 역을 수행했다.

안성희 역은 노래잘하는 배우 최수현이 했다.

잊혀진 여인,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남한 사회에 다시 등장한 것은 내 고향 해남출신으로 북한에 간 대학생 임수경이가 판문점에서 기자 회견을 할 때였다.

북한의 무용가 안성희가 임수경의 자유로운 남한 귀환을 촉구하는 성명 발표와 무용공연을 한 것이다.

안성희는 삶의 마지막, 죽는 날까지 남북한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예술과 정치의 쌍 줄타기를 하라는 숙명을 안고 산 자이다.

최승희와 안성희의 삶에 대해서는 물봉의 독특하고 집요한 연구열로 남보다 많은 비화를 비축하고 있다.

나는 살림에 도움이 안되는 것은 남보다 열 배는 연구하고 잠도 안 자 버린다.

훗날 시간이 되면 차분히 두 여인의 삶을 재조명해보겠다.

올해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주옥같은 노래를 만든 안성현 선생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사실 우리사회에서는 안성현 선생을 예술 그 자체만으로 보지 않고 이데올로기 문제가 개입되어 버리면, 또 시끌 사끌 해져버린다.

‘김원봉이나 정율성 소동’ 재판이 되어버린다.

안 성현이 월북한 사연을 기록해두고 오늘 글은 마치기로 한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그 해 11월까지는 인적 물적 남북한 내왕이 암암리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해 늦여름 안 성희는 목포에 짚 차를 타고 평양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안성희는 스무 살이 못 되었고, 안성현은 서른 살이었다.

북한 함흥에 있는 안성현의 아버지 안기옥과 최승희는 사제지간이었고 안성현의 아버지 안기옥과 최승희의 남편 안막과도 한 핏줄인 순흥 안 씨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격이 칼칼한 집안 핏줄은 순흥 안 씨다. 이 분들의 특징은 울분을 못 참으면 안철수만 빼고는 다 휘젓어 분다는 데 있다. 안중근, 안창호, 안재홍, 안대희, 안희정, 안성기 등이 그들이다. 죽는 것도 불사한다)

“성현 아재, 아버지가 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찝 차 타고 가십시다. 북 조선에서는 이미 교향악단도 창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남평에 홀로 계실 어머님이 걱정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애지중지했다는 안 기옥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그 길로 안 성현 작곡가는 안 성희가 타고 내려온 찝 차를 같이 타고 북으로 올라갔다.

ps. 오늘도 “기준에만 매몰된 삶이 얼마나 우리를 초라하게 하는가?” 라는 內心의 주제를 완전히 이탈하는 글을 쓰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더위에 지치지 말고 승리하는 날이 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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